박재성 논설위원 parkjs@etnews.co.kr
지난 44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이 개발된 후 지금까지 컴퓨터기술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은 아마 RISC(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ing)대 CISC(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ing)였을 것 같다.
전통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설계하는 아키텍처인 CISC방식에 대해 80년대 후반들어 명령어를 축약하는 새로운 기술방식인 RISC가 등장하면서 논쟁은 불이 붙었다. 이것은 컴퓨터업계를 양분했고 당시 세계 최대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업체인 인텔은 시장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RISC칩이 속도도 빠르고 저렴한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새로운 기술 추세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인텔은 CISC기술에 기반을 둔 486칩을 개발하면서 RISC기술에도 대대적인 투자를 해 i860칩을 개발했다. 그렇지만 i860칩은 당시 시중의 소프트웨어와 호환성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인텔이 RISC기술과 CISC기술을 동시에 개발하자 컴퓨터업체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져 들었다. 메이저 PC업체인 컴팩은 인텔에 CISC기술을 지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소프트웨어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새로운 기술인 RISC에 표를 던지고 있었다.
그 혼돈은 주요 컴퓨터업체들이 자사의 컴퓨터에 인텔의 486칩을 탑재하기로 하면서 CISC의 승리로 끝났다. RISC가 지니고 있는 모든 장점들이 하나의 약점인 호환성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시장을 잘못 예측한 대가는 혹독했다. RISC기술에 주안을 두었던 수많은 업체들은 큰 손해를 봐야만 했고 인텔도 RISC기술개발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판매, 기술 지원 등을 준비하느라 들인 엄청난 자금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앤디 그로브 인텔 CEO는 『인텔이 RISC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CISC를 택할 것인지를 컴퓨터업체들은 즉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른 시일내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마이크로프로세서 산업의 리더로서의 인텔의 위치는 사라지고 말 것 같았다』고 당시 심각했던 고민을 그의 저서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에서 술회했다.
국내에서는 IMT2000 사업권 신청마감이 이달 말로 돌아옴에 따라 누가 동기식 사업권을 신청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제 이동전화 사업자의 사장은 동기냐 비동기냐에 대해 최종 선택만 남겨 두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IMT2000 시장의 요구는 비동기식이 대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비동기식을 선택하면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정부가 업계 자율로 결정하도록 했던 방침을 바꿔 적어도 한개의 사업자는 동기식을 채택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어 그 주문도 무시못할 상황이다. 정부의 요구를 바로 거절하고 시장의 요구대로 비동기식을 선택했을 경우 앞으로 사업하는데 괴로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또 비동기식을 전제로 한 외국 업체와의 제휴(외자 유치)도 마음에 걸린다. 동기식을 택하면 날아가버릴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업자가 동기식을 자청하고 나오면 일은 쉽게 풀릴텐데 끝까지 버티고만 있다.
만에 하나 중국이나 기타 동기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 대부분 비동기식을 채택해버리고 동기식이 호환성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그렇지만 그 모든 책임은 사장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누가 시장의 요구가 아닌 정부의 요구대로 동시기식을 택할 것인가. 3개 이동통신 사업자 사장 가운데 적어도 한두명은 지금 피말리는 고민에 빠져 있을 것 같다. 시장만 살피기도 힘이 들텐데 정부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한국의 이동전화 사업자 사장의 고민을 앤디 그로브 전 인텔 CEO는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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