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琦秀 세계사이버棋院 대표
슈퍼컴퓨터란 당대의 가장 강력한 컴퓨터라는 말로 정의된다. 1940년, 50년대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핵무기 개발도구로 만들어진 초기의 거대한(덩치상으로) 컴퓨터들도 그 성능은 지금의 PC보다 못했지만 분명 그 시대에는 슈퍼컴퓨터였던 셈이다. 성능이 일진월보해서 초당 수천억번을 넘어서 최근에는 초당 수조번을 계산하는 기계가 등장했지만, 대당 판매가격은 항상 1억달러 미만에 머물고 있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수년 전 세계 서양장기 챔피언이었던 러시아의 캐스파로프를 이긴 IBM의 슈퍼컴 딥블루(Deep Blue)는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인공지능 면에서 슈퍼컴의 잠재력을 암시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기계가 사람을 이겼다고 해서 비관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 도구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지적활동 영역 중에서 슈퍼컴이 도구로 활용되는 분야는 날로 넓어지고 있다. 원자력, 기상예보, 비행기 설계, 자동차 설계, 전자부품 설계, 기계부품 설계, 고층건물의 내진설계, 신물질 개발, 인간유전자 데이터베이스, 생명공학, 우주의 기원 연구 등 학문연구와 기술개발의 광범한 분야에서 슈퍼컴은 인간의 필수도구로 자리잡고 있다.
슈퍼컴 확보를 둘러싼 냉전시대의 국제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은 슈퍼컴이 핵무기 개발과 핵무기 운반체 개발에 사용될 것을 우려하여 냉전기간 동안 전략물자 수출금지기구를 만들어, 공산권에 대한 슈퍼컴 수출을 봉쇄해 왔다. 심지어 자유진영의 우방국인 프랑스의 핵개발을 견제하기 위해 슈퍼컴 판매의 수출인가를 거부하여 프랑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탈퇴하면서까지 항의하는 불편한 관계가 10여년간 지속된 적도 있다.
일본에서는 정보통신분야 3대 대기업이 80년대 슈퍼컴퓨터 개발에 성공, 미국 이외의 유일한 슈퍼컴 생산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쓰쿠바대학·도쿄대학·교토대학 등 일본의 명문 대학들은 세계 최정상급 성능의 일본제 슈퍼컴을 갖추고 있다.
독일의 경우, 서남부 자동차 공업지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슈투트가르트 대학의 슈퍼컴센터가 자동차부품 시뮬레이션 센터로 유명하고, 기초과학 지원을 맡고 있는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슈퍼컴센터는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대학교수들이 여름방학에 대학원생들을 이끌고 독일에 가서 이 연구소의 슈퍼컴을 빌려 쓰는 일이 미국 국회에서 논쟁이 되었고, 그로 인해 탄생한 것이 미국 과학재단의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슈퍼컴센터지원법」이다.
오늘날은 슈퍼컴이 기초과학 지원을 위한 신사회간접자본(SOC)임은 물론이고, 국가의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필수도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위스·싱가포르·대만 등 작고 강한 나라들은 모두 산업기반기술 개발지원을 위한 정부의 슈퍼컴센터 지원체제를 갖추고 있다.
한국의 슈퍼컴 역사는 KIST 시스템공학연구소에서 72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CDC사이버 도입, 88년의 세계 최정상급 크레이2 도입, 93년 역시 당대 최정상급 성능의 제2호기 크레이C90로 이어졌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다른 나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98년으로 예정됐던 세계 최정상급 3호기 도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관 연구소의 통폐합 논의, 위상 논의로 3년의 세월이 낭비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당국자의 확고한 소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금년 초 국회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할 때, 슈퍼컴퓨터, 인터넷, 인간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라는 단어를 여러번 사용하며 미국의 교육개혁,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법안 통과와 예산증액을 역설하였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정부예산의 5%선으로 과학기술 관련예산을 증액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보도는 반가운 일이다. 필자는 이 5조원의 과학기술 예산 중 다시 그 1%, 즉 연 500억원을 국가의 신SOC 차원에서 대덕과학단지의 슈퍼컴센터 예산으로 배정해 줄 것을 기대한다. 이 금액은 우연히도 미국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여러 슈퍼컴센터의 단위예산과 일치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세계 최정상급 「인공지능」이 나머지 99%의 과학기술예산 효율성을 높이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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