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재벌 사업구조조정의 하나로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간의 반도체 빅딜이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난항을 거듭하자 정부나 재계 모두 일관성 없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11일 외신기자와 가진 오찬에서 『양사의 서로 다른 기업문화 때문에 통합노력이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며 『단일법인 설립이 결렬될 경우 책임이 있는 기업은 채권은행의 여신중단 등의 제재조치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정부로서는 사실 반도체업체가 빅딜을 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일이나 그것이 안되면 기업이 은행의 신규여신 없이 자립하면 된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정부가 그동안 빅딜의 불가피성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점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항간에선 반도체 빅딜이 무산되거나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혼란과 설왕설래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14일 CBS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위원장의 발언은 구조조정이 어려우니 안해도 좋다거나 안될 것이라는 얘기가 아닐 것』이라며 특히 『이 정부가 합의한 일,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선 안된다』고 즉각 반박했다.
오는 25일을 시한으로 책임경영주체 선정을 위해 막바지 작업에 돌입했던 LG반도체와 현대전자는 느닷없이 일어난 이같은 일 때문에 적지 않게 혼란을 겪고 있다.
김 대통령이 그같은 발언을 하고난 직후 LG반도체는 즉각 보도자료를 통해 빅딜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15일에는 현대전자 김영환 사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 정부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빅딜이 벽에 부딪친 것에 대한 책임이 LG반도체에 있음을 공식화했다.
특히 현대전자가 이날 발표를 통해 빅딜이 연구개발이나 설비투자비를 줄임으로써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조목조목 열거한 것은 그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의미있는 일이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제 와서야 그런 것을 발표할 일이 아니라 빅딜얘기가 불거져 나온 당초부터 그랬어야 했다. 그래야 빅딜이 국가나 산업 그리고 해당 업체에 어떤 득과 실이 있는지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다보니 아직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빅딜의 타당성이나 부당성에 일치된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또 해당 업체도 빅딜에 대한 생각이 엇갈리고 있다.
어쩌면 현대전자가 훨씬 이전에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면 LG반도체로서도 그에 대해 찬성이나 반론 등 어떤 것이든 제기함으로써 빅딜협상이 성사되건 깨지건 간에 지금쯤은 결론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는 먼저 빅딜을 제기한 정부가 그 작업을 했어야 함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어쨌든 현재로서 빅딜은 별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책임경영주체 선정을 맡고 있는 컨설팅업체인 ADL은 그 시한을 불과 열흘도 남겨 놓지 않은 지금까지도 선정 잣대인 평가항목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사가 이루어질 턱이 없다.
앞으로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평가항목 선정에 합의한다 하더라도 실사를 할 수 있는 기한은 열흘이 채 안된다. ADL이 아무리 능력있는 기관이라고 하더라도 그 짧은 기간에 거대한 두 회사의 경영상황을 실사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정한 시간에 쫓겨 섣불리 결과를 내놓는다면 그것은 자칫 졸속이나 부실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앞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빅딜협상이 진전이 없는 것은 빅딜에 따른 실리나 명분, 그 어느 것도 시원하게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정부가 빅딜은 무조건 필요한 것이니 업체들이 따라와달라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은 우리가 과거에도 수없이 봐왔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일관되게 주장해온 바이지만 빅딜은 그것을 단행하기 전에 반드시 득실을 따져봐야 한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단행되는 빅딜은 무리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그것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백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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