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난 후 우리는 그 창고극장에서 나와 남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직장생활을 했지만, 값비싼 외국원서를 구입하는 통에 항상 돈이 없었다. 여자를 사귀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여자를 만나지 않을 것이며, 사랑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했던 나였으므로 지금 다희와의 데이트는 결심에 위배되는 반란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면 가급적 돈이 안드는 산책을 많이 했다. 공원이나 한적한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인데, 지금도 남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곳은 산이기 때문에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다.
청계천 고가도로 아래에서 퇴계로를 가로질러 산으로 올라가면 남산순환도로와 만난다. 우리는 그 순환도로를 걸었다. 그렇게 조금 올라가면 서울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에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넓은 잔디밭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서울의 밤 불빛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려와서 밑에 깔려 있네요. 그래서 서울의 하늘에는 별이 없나 봐요.』
한동안 침묵하고 있을 때 그녀가 불쑥 말했다.
『별은 무슨, 전기 불빛이지.』
그렇게 말하려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때 왜 그렇게 대화가 빈곤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자 그녀가 컴퓨터에 대한 질문을 했다. 컴퓨터를 잘 알지 못하는 그녀가 그 질문을 한 것은 내가 말을 못하고 침묵을 지키자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였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이해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전문적인 컴퓨터 용어를 주워넘겼다.
『「GS COM80A」 컴퓨터에 채택된 버스는 「S100버스」였지요. 「S100버스」는 8080용으로 설계되어 사용되던 것으로 활용도가 높았는데, 1백개의 유니버설형 버스와 22개의 슬롯을 가지고 있지요. 「GS COM80A」가 한국의 기술진에 의해서 개발되었는데,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운용체계입니다. 「GS COM80A」에서 사용하는 디스크 오퍼레이팅 시스템은 76년 미국 디지털리서치사가 8080시리즈용으로 발표한 「CP/M80」이었습니다. 프로그램 개발언어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테어」 베이식이었고, 그 언어로 명령을 내립니다.』
『어떤 명령을 내리는데요?』
돌이켜 회상하면 그녀는 다른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고 아마 「명령한다」는 말은 알아들었는지 그렇게 물어왔다. 그때 나는 어리석게도 내 말을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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