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467)

환철, 그 친구가 사고를 일으킨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있다. 김창규 박사가 확보한 자료도 증거로 채택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방안도 없고, 그 친구의 오피스텔에 침입했던 것도 불법이었다.

만일 그 친구를 입건하기 위해 데이터를 공개한다면 일본의 통신망을 혼란에 빠트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그 친구의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이번 사고로 우리나라가 입은 신뢰도의 손상만큼 일본 통신망의 신뢰도에도 손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김지호 실장은 한동안 망설였다. 죽은 사람과 50억 현금이 문제가 되지만, 정보통신을 운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 친구의 데이터가 욕심이 났다. 데이터를 공개하여 그 친구를 범인으로 확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할 때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임, 김창규 박사가 이야기한대로 하나의 게임으로 진행시켜야 하는 것인가? 어째든 게임으로 즐기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김지호 실장은 계속 연못물에 널려진 벽지를 일일이 뒤져 붓글씨가 쓰여진 부분들을 찾았지만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염하의 바닷물로 새초롬이 고개를 든 아침 태양이 붉은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진기홍 옹에게 마무리된 것 같다는 말을 전했고, 진기홍 옹도 이제 작업을 끝내자는 말을 했지만 쉽게 발을 씻지 못하고 있었다. 미련이었다. 애착이었다. 잠자던 역사를 깨우는 일에 대한 정성이었다.

먼저 들어가라는, 좀더 살펴보고 들어가겠다는 진기홍 옹의 말을 뒤로 하고 김지호 실장은 계면쩍게 연못을 벗어났다. 건져놓은 책 조각이 마르기 위해서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찻집. 아침 태양이 창을 통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염하에 반사된 또다른 태양도 붉은 빛으로 김지호 실장의 눈을 부시게 했다. 저녁 노을을 보던 자리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게 여겨졌다.

주인 여자가 날라온 커피를 마시며 김지호 실장은 떠오르는 태양을 직시했다. 빛. 그 빛에는 힘이 있었다. 힘.

하지만 이곳이 강화도라는 것 때문에 또다른 생각이 따라붙었다. 힘없는 나라, 힘없는 왕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이곳 강화도 사람들의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듯 했다.

김지호 실장은 통신망의 장애와 죽은 사람들, 그리고 50억이라는 현금보다도 더 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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