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449)

『그래요. 운양호(雲楊號)사건이 일본의 침략야욕을 드러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계략에 말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개화와는 별개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시초가 되고 만 것 아니었습니까?』

포장공사를 위해 길이 파헤쳐져 있었다. 덜컹거리는 차의 흔들림과 뽀얀 먼지가 또다른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오랜만에 지나치는 비포장 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진기홍 옹의 말을 기다렸다.

『일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도 우리와 강화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요. 그 과정에서 많은 사연들이 발생했고요. 다 안타까운 일들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나라에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됐어요. 힘이 없으면 수모를 당하게 되어 있어요. 더욱이 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들은 더 큰 수모를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추수가 한창인 들판이 한폭의 그림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곡식을 가득 실은 경운기가 한가롭게 먼지를 날리며 지나치고 있었다. 키 큰 수수가 고개를 한껏 늘어뜨린 밭두렁 옆으로 노랗게 물든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감나무 사이로 한층더 짙어진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당시의 강화도를 떠올렸다. 1876년은 미국에서 벨이 전화기를 처음으로 발명한 해이기도 했다.

일본의 야욕이 공공연한 위협 침공으로 나타나기는 1875년 8월의 일이었다. 일본은 미국에서 건조한 신식 군함 운양호를 구입하여 위협하듯 조선근해를 운항했다.

그 운양호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접근한 곳은 부산항으로 1875년 4월 21일이었다. 현지 관헌은 생전 처음 보는 배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너무나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일본인들이 내세운 명분은 조선과의 교섭이 늦어지는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 위압적인 태도로 조선측 관헌을 대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는 잠시 관람하러 승선한 조선 관헌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연습이라고 하면서 일제히 시위 포격을 감행하여 동래와 부산의 관민들을 전율하게 하였다. 증기선 한 척 없는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여러 척의 군함들이 조선근해에 나타나 교대로 동, 남, 서 3면의 연안을 돌며 위협, 시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운양호 역시 함장 이노우에의 지휘아래 함경도 영흥만까지 북상하였다가 영일만을 거쳐서 나가사키로 귀항한 후 1875년 8월, 다시 일본을 출발하여 서해안을 측량하는 체하며 곧장 강화도로 접근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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