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18)

제4부 제3공화국과 경제개발-컴퓨터 입국의 꿈 (5)

65년 가을 성기수는 한국경제개발협회 조사역에 이어 한국기술개발공사에서 기술자문으로 잠시 일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소개했다시피 한국기술개발공사는 한국경제개발협회와 해외인력개발공사 등과 함께 60년대 중반 3대 관변 기구로서 고속도로와 항만 건설, 택지개발 등을 전담하던 곳이었다. 성기수에게 주어진 기술 고문이란 한국기술개발공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로 컴퓨터 교육을 담담하는 자리였다.

한국기술개발공사는 66년 국내 최초로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성기수의 컴퓨터 교육은 그 때를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60년대 중반은 집적회로를 이용한 제3세대 컴퓨터가 태동할 만큼 컴퓨터 기술이 발전해 있었지만 한국에는 아직도 단 한 대의 컴퓨터조차도 보유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주한 미8군은 이때 벌써 대구 컴퓨터센터에 2대(IBM 7010, IBM 1460), 부평보급창에 1대(IBM 1460), 용산사령부에 2대(IBM 1130, 유니백 9300) 등 5대의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한 공군에도 버로스 E 400(Burroughs E 400) 기종 한 대가 설치돼 있어 주한 미군은 모두 6대나 되는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는 또 한국 최초의 컴퓨터회사인 한국IBM이 아직 출범하기 전이었다. 현지법인이나 지사가 없었던 탓에 미국IBM은 한국에서 현지 채용한 한국인 직원들을 미군 영내에 상주시키면서 컴퓨터 교육과 유지보수를 전담케 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박용호(朴龍鎬, 재미), 손용호(孫容浩, 전 한국IBM본부장), 이정희(李貞姬, 90년 한국IBM 퇴직), 김영수(金榮洙, 전 삼성전자 사장, 현 미국 AST사장) 등으로서 한국에서는 제1세대 컴퓨터 엔지니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60년을 전후해서 공채나 추천으로 IBM에 정식 입사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을 지휘 감독하던 이가 미국 본사에서 파견된 루이 스탠트(Stant, B. Louis)였다. 스탠트는 이들을 주축으로 67년 4월 25일 자본금 4천7백25만원 규모의 한국IBM을 설립하고 초대(67.4∼68.2) 사장자리에 앉았다. 한국기술개발공사에 있을 때 성기수는 이들 IBM직원들과 교분을 트면서 여러 가지 컴퓨터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기술개발공사 직원용 컴퓨터교육 교재도 이들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66년부터 성기수는 IBM직원들로부터 당시로서는 최고급 프로그램언어인 포트란(FOTRAN) 매뉴얼 1백 권을 공급받기도 했다. 이때는 이미 성기수가 한국기술개발공사 측을 설득해서 최신 과학기술계산용 컴퓨터인 IBM 1130을 도입토록 IBM과 합의해 놓은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국내 최초의 컴퓨터 도입이 이뤄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한국기술개발공사가 IBM 1130을 들여올 경우 성기수가 전산실을 맡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나 IBM과의 정식 도입 계약이 성사될 무렵 한국기술개발공사 측 간부들의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도입될 컴퓨터가 한국 상황에서는 실제로 그다지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주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IBM 1130의 도입 가계약을 흐지부지됐고 한국 최초의 컴퓨터 도입 기록은 1년 뒤인 67년 4월 IBM 1401을 들여온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돌려야만 했다. 한국기술개발공사와 IBM간의 가계약은 성기수와 스탠트가 직접 협상해서 이뤄진 것인데 한국 최초의 컴퓨터 도입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린다는 차원에서 IBM측이 공급 가격을 매우 저렴하게 할 것 등을 약속한 상황이었다. 성기수 측에서도 한국의 우수한 재원들을 IBM직원으로 선발해주기로 약속했는데 이때 성기수의 추천으로 67년 한국IBM에 입사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 학생 김성중(金聖中, 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이다.

66년 한국기술개발공사에 IBM 1130이 도입됐더라면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컴퓨터의 성능은 과학기술계산용 포트란언어를 지원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는데 국내에서 비로소 이 언어가 지원되는 컴퓨터가 첫 선을 뵌 것은 이로부터 3년 뒤인 69년 8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이 도입한 CDC3300을 통해서였다. 초대 KIST전자계산실장 성기수가 직접 고른 CDC3300은 미국 컨트롤데이터사(CDC)가 개발한 초대형컴퓨터로서 도입순서로 보면 한국에서 12번째에 해당된다.

한국 정부가 컴퓨터 도입을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은 66년부터였다. 정부는 66년에 실시됐던 간이 인구센서스 처리를 놓고 고민하던 중 경제기획원 차관 김학렬(金鶴烈)이 과감하게 컴퓨터의 도입을 지시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은 이미 61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처리를 위해 천공카드시스템(Punch Card System)을 도입해 사용 중이었다. 소정의 종이카드에 구멍을 뚫어 데이터 값을 표시하는 기계장치인 천공카드시스템은 그러나 컴퓨터 처리에 비해 얼마간의 계산시간을 단축시켜주는데 그쳤을 뿐 실제로는 「손으로 데이터를 집계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었다. 경제기획원은 결국 천공카드시스템으로는 67년부터 시작되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추진에 쓸 각종 통계치를 제 때에 뽑아 쓸 도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조사통계국과 비슷한 시기에 컴퓨터 도입을 검토하고 있던 곳으로는 한국기술개발공사를 비롯하여 한국생산성본부, 보건사회부 산하 국립보건연구원, 육군본부, 한일은행, 산업은행, 유한양행 등 모두 10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1년 6개월~2년 동안의 검토기간을 거쳐 68년 10월 말까지 컴퓨터를 도입한 곳은 7군데나 된다. 67년 4월 경제기획원의 IBM 1410을 시발로 한국생산성본부가 5월 일본 후지쓰로부터 파콤222(FACOM 222)를, 국립보건연구원이 11월 미국 스페리(Sperry)사로부터 유니백1005를 각각 도입했다. 68년에는 유한양행(5월)이 경제기획원의 IBM 1401을 물려받았고 육본(6월)이 유니백9300을, 한일은행(6월)과 산업은행(10월)이 NCR C-500과 유니백9400을 각각 설치했다.

한편 한국기술개발공사의 컴퓨터 도입이 무산되면서 실의하고 있던 67년초 어느 날 성기수는 미국의 바텔(Battelle)기념연구소에서 KIST의 컴퓨터기술 고문으로 파견 나와 있던 미국인 에반스(Evans, Donald)를 만났다. 한국IBM의 창설작업차 장기간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스탠트가 다리를 놓았다. 앞으로 KIST전산실 설립과정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겠지만 바텔기념연구소는 65년 5월 한미정상회담 직후 백악관 뜰에서 발표된 박정희-존슨 공동성명에 따라 서울에 설치키로 한 KIST의 미국 측 기술용역자문 연구소였다. 미국정부를 대신해서 용역을 체결한 바텔기념연구소는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함된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에반스였다.

에반스는 스탠트가 소개하기 전에 이미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61년 하버드대학원 유학때 도움을 줬던 보스턴 텁스 대학의 한국계 기계과주임 교수 해리 최(崔)가 66년 초 서울을 방문했을 때 성기수는 에반스와 함께 셋이서 태릉(泰陵) 육군사관학교를 견학한 적이 있었다. 해리 최와 에반스는 이미 미국에서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이였다. 그때만 해도 성기수는 자신이 에반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에반스를 두번째 만나던 날 성기수는 계량경제학(計量經濟學)을 이용해서 한국의 경제성장모델을 연구해 보겠다는 계획서를 지참했다. 계량경제학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한국경제개발협회에서 세계은행에 제출한 한국의 15년 장기경제개발계획을 계량해본 경험이 있는데다 66년 5월에는 도쿄에서 열렸던 제2차 극동지역 개량경제학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경제성장 최적화를 위한 일반이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경력도 갖고 있었다.

도쿄 학술대회에서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대회장에 와서보니 이미 사전에 배포된 자신의 논문 중에 틀린 수학공식이 하나 눈에 띠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그날 대회장에 참석한 미국인, 일본인 경제학자들이 수학을 잘 몰라서였는지 아무도 그 오류를 지적해 내는 사람이 없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성기수의 제안을 들은 에반스는 대뜸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바드 기계공학박사라며 자랑하던 이 친구가 지금 경제학을 하겠다는 것인지 컴퓨터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성기수는 자신의 계획을 분명히 밝혔다. 경제이론과 수학과 통계학이 혼합된 계량경제학 분야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컴퓨터 응용기술분야를 해보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전한 것이다.

67년 봄 성기수는 에반스의 추천으로 KIST에 임시연구원으로 채용됐다. 여기서 그는 6개월 동안 당시 육사교관이던 김덕현(金德賢, 재미), 바텔기념연구소의 파견 연구원 택슨(Taxon, Mike)등과 함께 공동으로 한국의 중장기 컴퓨터 수요조사를 했다. 어떤 분야를 전산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한국에 상당한 컴퓨터 수요가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 조사결과에 따라 KIST는 우선 KIST 내에 전자계산실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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