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319)

2020호실. 김지호 실장은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게 벨을 누르며 건물의 구조를 살폈다. 마지막, 맨 끝방. 통로 끝으로 비상구가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그 비상구 문을 열어보았다. 자연스럽게 문이 열렸다. 늘 열고 닫았던 것처럼 소리 없이 열렸다.

비상구는 곧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20층. 창연 오피스텔의 맨 윗층. 계단이 아래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광화문 네거리의 모습이 보였다. 화재가 발생했던 1호 맨홀 주변에는 아직도 통신 케이블이 감겨 있는 드럼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길게 늘어서 있는 은행나뭇잎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무전기의 키를 열지 않아도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듯 가까운 직선거리. 김지호 실장은 눈에 익은 동료 직원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천천히 비상계단을 내려섰다. 저녁 해가 서대문 쪽으로 지고 있었다. 맨홀에 화재가 발생한 지 만 하루가 지난 것이다.

19층. 19층 비상구 앞에 서서 문을 밀쳐보았다. 만만히 열리지 않았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김지호 실장은 다시 비상구 문을 닫고 계단으로 내려섰다.

18층. 18층의 비상구 앞에 서서 문을 밀쳤다. 아무런 소리 없이 자연스럽게 비상구가 열렸다.

「수사중. 접근금지」 열린 비상구 바로 앞이 1820호실. 처제 현미와 같이 근무하던 일동은행의 직원이 죽었다는 곳이었다.

이제 문이 닫혀 있었다. 현장을 지키는 경찰관은 아직 남아 있겠지만 이미 사건은 사건으로서의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다시 비상구를 통해 밖으로 나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19층. 20층. 옥상.

전망이 좋았다. 서대문 쪽 건물 틈바구니에 걸려 있는 태양이었지만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인왕산과 삼각산을 잇는 공제선이 하늘 빛과 단풍진 땅의 빛으로 활활 불타는 듯했다. 김지호 실장이 눈을 돌리자 바로 옆 건물 옥상에 서 있는 거대한 안테나 하나가 보였다.

1호 위성과 2호 위성을 활용한 통신과 방송용 안테나였다. 무주구천동 하늘. 그 안테나의 각도는 1호 위성과 2호 위성이 자리하고 있는 무주구천동 구만리 상공의 하늘을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은옥. 김지호 실장은 불현듯 자신의 처 은옥을 떠올렸다. 어제 느닷없이 발생한 위성사고의 뒷수습을 위해 애쓰고 있을 은옥이었다. 오늘도 집에 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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