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82)

불.

불은 순수다. 단순이다.

불은 여러가지 것으로부터 단 하나를 만든다.

그 불에는 힘이 있다.

세상의 허다한 철학과 논리는 그 언어적 화려함과는 달리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불은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시키고 현실화시킨다. 그것은 힘이다. 강력한 힘. 존재의 꼬리를 점화시켜 엄청난 추진력을 발산하는 에너지이다.

또한 불은 자유롭다. 수천년 동안 많은 불이 타다가 사그러들었지만 동일한 모습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불은 그 임의성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롭다.

혜경은 맨홀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어떤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오피스텔에 가득 켜두었던 촛불과는 다른 신비로움이었다. 자유롭게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부터 치솟아 땅과 하늘을 잇는 불꽃을 바라보며 혜경은 자신의 마음도 훨훨 타오르는 듯했다. 하나의 의식 가운데 자신이 서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모든 의식의 끝은 불이었다. 제사를 지내도, 장례를 치른 후에도 그 끝은 불이었다. 불로 마지막 남은 것들이 정리되었다. 그것은 지상과 새로운 세계를 잇는 의식이기도 했다.

광화문 네거리와 종로쪽, 시청쪽에서 솟구쳐 오르는 불꽃은 이제 여러 개의 불기둥이 되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환상. 혜경은 도시 전체가 훨훨 타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지하의 통신케이블을 통하여 도시 전체 건물에 불이 붙어 타는 환상에 빠져든 채 신비롭게 솟구치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경은 그 불꽃을 바라보며 또 다른 환상에 빠져들었다.

쭈뼛쭈뼛 머리가 서는 듯했다.

등줄기로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사타구니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사타구니로부터 가슴을 치고 올라와 머리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흥건히 젖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환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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