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77)

사내는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꽃이 계속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내는 갈증을 느꼈다.

딸깍.

냉장고 안의 맥주캔 하나를 집어들고 꼭지를 눌렀다. 캔의 뚜껑이 열리는 것을 손으로 느꼈다.

창밖을 계속 내다보며 한모금 들이켰다. 하지만 사내의 그 갈증은 시원한 맥주로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솟아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그녀의 침대를 떠올렸다.

혼자 지내는 여자의 오피스텔, 그 넓디넓은 침대를 떠올렸다.

유난히 큰 침대.

아늑하게 꾸며진 그녀의 침대를 생각했다.

가지각색의 촛불과 함께 그녀의 땀냄새도 떠올랐다.

신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해냈다. 모든 창조와 변혁에는 혼돈이 수반된다. 사내는 매일매일,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느끼곤 했다.

사내에게 있어서의 섹스는 혼돈과 질서를 넘나드는 문이었다.

새로운 세계였다.

환한 빛과 함께 미로의 입구처럼 열리는 신비의 문, 사내는 절정의 순간마다 육체의 반응뿐만 아니라 상대의 의식의 흐름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새로움이었다.

시도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의 확인이었다.

과정이 혼돈이라면 그 결과는 늘 새로운 질서의 세계였다.

그 과정에서 사내는 늘 의식의 파괴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의식의 파괴였다. 파괴는 새로운 창조의 전단계였다.

상대여자의 의식이 철저하게 파괴되면 될수록 섹스는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사내에게 여자의 육체 또한 파괴의 대상이었다.

손끝 하나, 혀끝 하나로 무너지고 파괴되는 여자의 육체는 사내에게 있어서 새로운 세상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신봉의 대상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위해 기다릴 줄을 알았다. 기다림은 완전한 파괴를 위한 작업이었다.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단 한순간 여자의 육체를 파괴하기 위한 노력, 그것은 단련이 필요했다. 사내는 그 파괴 뒤에 오는 원초적인 새로운 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 더 구체적인 것은 없었다. 분명 새로운 세상이었다.

여자와 남자, 요(凹)와 철(凸)의 직접적인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힘이다. 분명 그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은 아닐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상대적 존재로서의 상대. 사내에게 그 상대는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육체였다.

섹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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