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비롯한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은 현재 격변기를 맞고 있다. 연구과제를 경쟁적으로 수주해 인건비를 확보해 온 기존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가 예고된 상황으로, 국가전략 임무 중심의 역할 재편이 요구되고 있다. 아울러 전 세계를 강타한 인공지능(AI), 디지털전환(DX) 열풍 대응도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여러 출연연이 숨 가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취임 5개월여의 박세웅 ETRI 원장도 국가 임무 중심의 연구체계 전환, AI·DX 융합을 두 축으로 기관 운영 혁신에 나서고 있다.
박 원장은 “ETRI의 변화는 연구비 편성 방식이나 조직개편의 문제가 아닌, 국가연구기관으로서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했다. 기관의 근원을 살피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잘하는 일부보다는 전체, 위보다는 아래를 위하고자 한다는 그의 평소 지론도 기관 운영과 연관해 함께 밝혔다.
현대 연구개발(R&D) 경쟁은 맹목적이고, 차갑다는 인상이다. 이 와중에 주어진 소명을 다시 돌아보고, 따뜻한 기술을 추구하는 박 원장을 만나 그가 품은 생각들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출연연 최대 이슈인 탈 PBS의 조류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앞으로 정책 지정 사업을 포함한 '임무형 연구'를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 올해 기준 비중이 36%인데, 이를 2030년까지 90%로 높이고자 한다. 반대로 수탁 연구 비중은 현 64%에서 10%로 낮추는 것이 목표다. 물론 기업을 위한 수탁 연구, 국가적으로 참여가 필수적인 수탁사업은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직원들의 행정부담이 많이 줄어들 것 같다.
▲기존 PBS 체계에서는 연간 600여 개 과제에 연구역량이 분산돼 왔다. 과제 수주 자체가 목표가 되는 구조 속에서 연구자들이 수많은 제안서와 보고서를 쓰는데 시간을 빼앗겨 왔다. 'ETRI의 경쟁력은 제안서에 있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인데, 연구원이 실제 연구에 투입하는 시간은 주당 40시간의 근무 중 15시간 남짓이라고 한다. 나머지 시간의 상당수가 과제를 따고, 제안서를 쓰는 시간이다.
그런데 PBS 폐지와 더불어 임무형 연구를 강화하면, 10억원 정도의 소규모였던 다수 연구의 '스케일'을 50억~100억원 규모로 키우고 과제 수도 줄일 수 있다. 이는 불필요한 연구행정으로 낭비되던 시간과 에너지를 직원들에게 돌려주는 기반이 된다. 불필요한 일에 쓰일 시간이라면 차라리 노는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다. 돌려받은 시간은 운동이나 사색, 자신이 가진 것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쓰이길 바란다. 이런 풍토가 안착하면 3년쯤 뒤에는 연구 생산성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믿는다.
-중점을 둔 연구영역을 소개해 달라.
▲AI, 피지컬AI, 입체통신, 공간결합, ADX 융합을 5대 중점 연구영역으로 설정했다. 특히 AI 분야에서는 차세대 범용지능, AI 데이터센터 컴퓨팅, AI 특화 반도체, AI 안전과 사이버보안 등 핵심 기반 기술 강화에 나선다. 과학기술 연구를 지원하는 AI 연구 동료 플랫폼도 추진한다. AI 기술을 외부에서 가져다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모델·컴퓨팅·반도체·안전기술을 아우르는 연구역량을 확보하겠다는 접근이다.
피지컬 AI 영역에서는 산업현장과 일상에서 인간을 돕는 지능형 시스템을 개발한다. 단순한 로봇 동작 시연을 넘어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실세계 지능' 기반 구축에 중점을 둔다.
입체통신 분야는 6G AI 네트워크와 저궤도 위성통신, AI-RAN, AI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AI 고속도로'가 대표적인 연구 방향이다. 차세대 통신 핵심기술과 국제표준 선점에도 힘을 싣는다.
공간결합 분야는 현실과 가상 공간을 실시간 연결해 몰입형 콘텐츠, 원격협업 등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고, ADX 융합은 AI와 DX를 결합하는 기술 분야다.

-5개 영역 모두 AI와 연계돼 있다.
▲그 중요성, 강력함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마치 신이 인간을 만들어냈듯이 AI는 인간의 피조물이다. 다만 AI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되고 있다.
지금도 AI 개발의 90% 영역은 AI 스스로 담당하고 있다. '자가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특정 부분이 아닌, 모든 부분에서 인간보다 앞선 '인공초지능(ASI)' 실현도 곧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는 이런 압도적인 존재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보며, 이런 생각이 중점적으로 설정한 연구 주제에도 녹아들었다.
-'따뜻한 세상' '인간 중심' 키워드를 강조했는데, 이것도 AI와 연계된 것이라 들었다.
▲새로운 경영비전으로 'AI·DX 혁신으로 이끄는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제시했다. 세계적 수준의 AI·ICT 원천기술을 확보하되 그 성과는 돌봄, 이동, 장애 극복, 안전, 생산성 향상과 같은 현실의 문제 해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다. 우리가 제시한 '인기일체(人技一體)'라는 표현에도 인간 중심의 기술혁신이라는 지향점을 담았다.
이것은 제 삶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평소에 핸디캡이 있는 사람도 모두와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AI, 피지컬AI와 같은 기술 발전으로 더욱 그 지향점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이런 기술 발전에 ETRI가 앞장서 가자는 것이다. AI 시대에 필요한 기술을 가장 먼저 개발하는 곳인 동시에, 그 기술을 사회가 신뢰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곳으로 ETRI를 만들고자 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기술의 발전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배치되기도 한다. 육체노동의 가치는 0으로 수렴할 정도로 떨어지게 되고, 사람의 존재가치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된다. 이미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AI와 대화하고 논의한다. AI가 인간성, 인간의 가치를 앗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기술개발을 등한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술적 특이점(싱귤래리티)'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ETRI가 기술 발전으로 비롯될 차가움을 상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 경영 비전에 담았다.
-기관 경영혁신에도 여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구사업 구조를 바꾸더라도 연구자의 일하는 방식이 그대로라면 혁신은 지속되기 어렵다. 연구자 처우 개선, 행정혁신이 중요한 이유다. 연구성과는 결국 연구자가 만들어낸다.
내부의 결핍 요인을 보완하는 '비타민', 불필요한 부담을 제거하는 '디톡스'를 병행코자 한다. 비타민은 평가·보상체계 개선, 우수성과 상여금, 연구밀착형 행정지원, 전문행정 인재 육성 등이다. 디톡스는 형식적인 보고와 소모적인 학술·행정활동, 반복적인 업무 절차를 줄이는 것이다.
이로써 ETRI 내 연구환경을 바꾸면 이는 '조직 전반의 연구능력'을 올리는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환경 속에서는 모두가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전체 연구원의 '레벨 업'이 가능하다.
이것을 '생활체육'에 빗대 주변에 설명하곤 한다. 잘하는 소수를 육성하는 '엘리트 체육'이 아니라, 모두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생활체육을 지향하는 것이 제 경영혁신 목표다.

-연구의 임팩트, 사업화 제고 방안은 있는지.
▲당연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좋은 논문과 특허가 나왔더라도 기업이 활용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삶에서 효용을 확인할 수 없다면 공공연구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양적 확대보다 질적 탁월성, 사회·산업적 파급효과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현재 ETRI가 과거의 4메가 D램, CDMA 기술을 도출했을 때처럼 양적으로 많은 성과들을 쏟아낼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경제발전기 당시에는 출연연에 전폭적인 국가지원이 이뤄진 시기로, 현재 출연연에 대한 지원 여건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정부 및 관련기관과 협의해 타겟팅 분야와 미션을 설정하고 최대한의 임팩트를 낼 수 있는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이에 지식재산(IP)의 경우 단순 출원 건수 경쟁에서 벗어나 글로벌 영향력이 높은 핵심특허를 선별하고 활용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는 AI 기반 특허 관리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또 세계적 연구조직인 '알파랩'을 육성해 학술성과 창출에도 나선다.
사업화는 연구기획 단계부터 추가 R&D와 실증, 기술이전, 창업 등을 고려해 힘을 싣는다. 또 연구부서와 사업화·기업지원 조직이 함께 기술 수요를 발굴하고, 상용화의 마지막 단계를 지원하는 전주기 성과확산체계를 고도화할 방침이다.
-경영상 청렴, 도덕성도 특히 내부에 강조하는 것으로 안다.
▲신뢰가 없다면 연구기관의 진짜 경쟁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이룬 성과여야만 국민의 인정 역시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기관 운영상에서는 청렴을, 인사에서는 전문성 및 성과만큼 도덕성을 중요하게 본다. 불합리한 관행에 대한 의견도 듣고 개선 결과를 공유하면서,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기관장인 저 역시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 어떤 관계나 부탁 앞에서도 공정한 기준을 지킬 것이다. 특히 청렴과 도덕성에 있어서는 저와 간부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고, 지위나 성과를 이유로 예외를 두지 않겠다.
-내세운 여러 혁신안들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ETRI의 모습은.
▲여러 모습을 설명했다.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먼저 정의하고 연구하는 기관,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관, 연구실의 성과를 산업 현장으로 연결하는 기관 등의 모습이다.
이로써 궁극적으로 기술의 경쟁력을 국민의 삶으로 증명하는 기관을 만들고 싶다. 우리 노력이 실제 생활상에 드러내게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에 대한 평가도 국민의 삶과 산업의 미래를 얼마나 바꾸었는지에 따라 받고자 한다.
○박세웅 ETRI 원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해 같은 대학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를,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시스템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에는 AT&T 벨연구소에 입사해 활동했고, 1994년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 2020년에는 한국통신학회장을 역임했다. 141편에 달하는 무선 네트워크 및 네트워크 설계·성능분석 분야 SCIE 논문을 작성했으며 해동학술대상(2012년), 근정포장(교육훈장·2025년), 삼성전자 휴먼테크 금상(2026년) 등을 수상했다. 지난 5월에는 ETRI 원장으로 취임, 격변기의 기관 혁신을 이끌고 있다.
김영준 기자 kyj85@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