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과제를 대신 수행하는 시대에 학습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AI에 곧바로 답을 맡기기보다 먼저 스스로 문제를 풀고 AI를 활용한 뒤 다시 혼자 확인하는 방식으로 학습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제영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원장은 4일 서울 마곡동 시스원 본사에서 열린 스마트포럼에서 '인공지능 학습혁명-무엇을 어떻게 학습해야 하나'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AI가 과제를 대신 써 주는 시대에 졸업장은 무엇을 증명하는가”라며 AI 활용 확산에 맞춰 교육과 평가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AI가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수준을 넘어 과제를 완성하는 '에이전틱 AI' 단계로 발전하면서 결과물만으로 학습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정 원장의 진단이다.
다만 AI 자체가 학습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 원장은 하버드대 물리학 무작위 대조 실험을 사례로 들며 AI 튜터를 활용한 능동적 학습이 대면 수업 대비 효과크기 0.63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핵심 문제로는 '가짜학습'을 꼽았다. 과제는 완성됐지만 학습 내용이 내면화되지 않고 학습자 자신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 원장은 튀르키예 고교생 약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를 소개했다. 범용 GPT-4를 자유롭게 사용한 집단은 연습 기간 성적이 38% 올랐지만 AI를 제거한 시험에서는 통제집단보다 17% 낮은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AI가 직접 답을 제시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식 문답을 유도하도록 설계한 교육용 버전을 사용한 집단은 학습 성과를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연구 사례도 제시했다. 챗GPT를 이용해 글을 작성한 집단에서는 자신의 글을 재현한 비율이 12%에 그친 반면, 먼저 스스로 글을 쓴 뒤 AI를 보조적으로 사용한 경우에는 뇌 활성화와 기억이 유지됐다는 설명이다.
정 원장은 “같은 AI를 같은 시간 쓰고도 순서가 결과를 가른다”고 말했다.
대안으로는 '먼저 스스로 씨름하고(Before)-AI와 함께 탐구하며(With)-다시 혼자 확인하는(After)' 학습 원칙을 제시했다.
'논어'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사례로 들었다. 지식을 받아들이는 '학(學)'은 AI가 잘할 수 있지만 반복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습(習)'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AI 시대 인재상으로는 'W자형 인재'를 제시했다. 전공 지능과 인공지능을 두 개의 수직축으로 두고 비판적 사고·창의적 문제해결·협력적 소통·윤리적 판단 역량을 연결하는 구조다.
정 원장은 이를 '체화된 역량×AI 활용 역량=증강지능'으로 표현하며 어느 한쪽의 역량이 부족하면 AI를 활용한 학습 효과도 제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의 AI 교육 방향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AI 자체를 배우는 'AI-X'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각 전공의 탐구와 문제 해결 과정에 AI를 활용하는 'X with AI'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 혁신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평가 방식이 교수·학습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워시백 효과(Washback Effect)'를 근거로 “수업 혁신 100번보다 기말고사 문항 1개를 바꾸는 것이 더 강력하다”고 말했다.
과정 중심 평가와 역량 증명 평가로 전환하고 학습자가 AI에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AI의 답변을 어떻게 수정했는지를 기록하는 'AI 활용 과정 보고서'를 도입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스마트포럼은 전자신문과 도산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하고 시스원이 후원한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