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처투자에서 계약서는 단순한 법률 문서가 아니다. 투자자와 창업자가 앞으로 수년 동안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약속하는 설계도다. 같은 사업계획서를 보고도 어떤 계약을 맺느냐에 따라 기업 성장 속도가 달라지고, 후속 투자 가능성이 달라지며, 때로는 기업 운명까지 바뀐다.
지난 6월 말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투자가 벤처투자 표준계약서를 개정한 이후 한 달여가 지났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현장에서는 이번 개정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번 개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투자계약(SPA)과 주주간계약(SHA)을 분리하고, 라운드별 집합동의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RCPS 중심 구조를 완화하고, 리픽싱과 IPO 관련 일부 조항도 손질했다. 얼핏 보면 계약서 문구를 정리한 수준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벤처투자 문화 방향을 바꾸려는 중요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초기 투자 현장에서는 사전동의권이 자주 논란이 됐다. 회사가 유상증자하거나 중요한 경영 의사결정을 할 때 투자자 전원 개별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초기에는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기업 의사결정을 늦추고 후속 투자 유치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특히 여러 차례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은 투자자가 수십 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 과정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투자자가 생기거나, 소수 투자자 의사결정 지연으로 전체 거래가 늦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스타트업에 시간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기술보다 먼저 시장이 바뀌고, 경쟁사보다 먼저 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기업들에 의사결정 지연은 곧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에 도입된 라운드별 집합동의는 이러한 비효율을 줄이기 위한 장치다.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투자 이후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행정적 부담은 상당 부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RCPS와 리픽싱 조항 변화다. 과거에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다양한 안전장치가 계약서에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투자자는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일정 수준 보호장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보호장치가 지나치게 많아질 경우 후속 투자 유치가 어려워지고, 창업자 동기부여가 약해지며, 기업가치 산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개정은 투자자 보호를 포기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보호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계약서에 복잡한 권리를 추가하기보다 기업 기술력과 시장성, 경영진 역량, 성장 가능성을 더 면밀하게 검토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 투자 현장에서도 계약조항보다 고객 확보 현황, 반복 매출, 제품 완성도, 후속 투자 가능성 등을 더 깊게 논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투자자는 계약서보다 기업 자체를 더 많이 들여다보고, 창업자는 계약 협상보다 사업 성과를 증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건강한 투자문화다.
물론 아직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존 투자계약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번 개정 역시 신규 계약부터 순차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투자기관마다 내부 기준도 다르고, 대형 투자나 복수 투자자가 참여하는 거래에서는 개별 계약이 계속 활용되고 있다. 표준계약서가 곧바로 시장 표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과거에는 투자자마다 서로 다른 계약서를 제시하면서 협상 기준 자체가 달랐다면, 이제는 적어도 표준계약서라는 공통의 출발점이 생겼다. 창업자도 무엇이 일반적인 조항인지 비교할 수 있게 됐고, 투자자 역시 계약 공정성과 시장 수용성을 함께 고려하게 됐다.
앞으로는 계약서 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설서 보완과 실제 적용 사례 축적, 투자자와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한 교육 그리고 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제도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표준계약서는 단순한 참고서가 아니라 시장 신뢰를 만드는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벤처투자 본질은 계약이 아니다. 좋은 기업이 더 크게 성장하도록 자본을 연결하는 일이다. 계약은 그 성장을 돕기 위한 장치여야지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표준계약서 개정이 진정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계약 조항이 바뀌었다는 사실보다, 투자자와 창업자가 서로를 더 신뢰하고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투자문화가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결국 좋은 계약은 어느 한쪽이 더 많은 권리를 갖는 계약이 아니다. 투자자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고, 창업자가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으며, 기업이 다음 단계 성장을 이어갈 수 있도록 균형을 만들어 주는 계약이다. 이번 개정이 대한민국 벤처투자 시장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전화성 초기투자AC협회장·씨엔티테크 대표이사 glory@cnt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