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글로벌 제조 산업은 단순한 디지털전환(DX)을 넘어,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제조 AX(AI Transformation)'로의 거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제조 현장에서는 데이터의 파편화라는 고질적인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 제품의 설계(Design) 데이터와 실제 공장의 생산(Manufacturing) 데이터가 서로 다른 언어로 존재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제조 AX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설계부터 최종 양산에 이르는 모든 물리적 가치 사슬을 디지털 공간에 정밀하게 모사하고 제어할 수 있는 엔드투엔드(End-to-End) 플랫폼이 필수다. 그리고 이 플랫폼의 '뇌'에 해당하는 핵심 기술이 바로 데이터 간의 인과관계와 맥락을 컴퓨터가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정의하는 '온톨로지(Ontology)'다.
◇두 흐름이 만나지 못하는 지점: 설계의 깊이와 데이터의 넓이
글로벌 시장에는 이미 제조 혁신을 이끄는 강자들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설계와 엔지니어링에 뿌리를 둔 기업들이다. 다쏘시스템(Dassault Systemes)과 지멘스(Siemens) 같은 기업들은 강력한 3D CAD와 제품수명주기관리(PLM) 솔루션을 앞세워 가상 세계에서의 정교한 설계와 현장 데이터 연동까지 폭넓게 확장해왔다. 다만 이들의 강점은 태생적으로 설계·엔지니어링 도메인에서 출발한 만큼, 제조 현장에서 분초 단위로 발생하는 운영기술(OT) 데이터를 설계 맥락과 실시간으로 엮어내는 영역은 상대적으로 후발 구간에 가깝다.
다른 한 부류는 데이터를 지향하는 실리콘밸리 중심의 소프트웨어(SW) 기업들이다. 대규모 데이터·AI 파이프라인의 표준을 만들어온 데이터브릭스(Databricks)나 빅데이터 분석의 강자 팔란티어(Palantir)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데이터 저장 능력을 바탕으로 공장의 수많은 사물인터넷(IoT) 센서 값들을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시각화 하는데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강점에도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결정적 한 조각이 있다. 제조업의 뿌리이자 핵심 자산인 '도면(CAD)' 내부의 기하학적 연관성과 설계 맥락까지 스스로 이해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설계 도면이 지닌 맥락 정보와 현장의 물리적 움직임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정교한 센서 데이터 분석이라도 “무엇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본질적인 인과관계까지 설명하기 어렵다.
즉, 설계의 깊이를 가진 기업들은 가동 데이터의 실시간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고, 데이터의 넓이를 가진 기업들은 설계 도면이 담고 있는 본질적 구조에 닿지 못하고 있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접점을 채우는 핵심 기술이 바로 온톨로지다.
◇유럽이 던지는 질문: 데이터 주권은 누가 쥐고 있는가
미국의 팔란티어는 방대한 도메인 데이터를 온톨로지 기반으로 구조화하여 국방과 공공 영역에서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주며 시장을 흔들었다. 그러나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움직임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2026년 6월, 프랑스 정부는 국내안보총국(DGSI)이 팔란티어와의 계약을 끝내고 자국 기업 챕스비전(ChapsVision)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총리는 이를 알리며 “디지털 영역에서의 새로운 종속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스위스는 보안 우려를 이유로 팔란티어 입찰을 최소 아홉 차례 거부했고, 독일군은 군용 클라우드·AI 사업에서 유럽산 대안을 선택했다. 영국 NHS 역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압박 속에 대규모 데이터 처리 계약을 재검토하고 있으며, 덴마크와 네덜란드도 자국 대안 확보에 나섰다.
이 사례들은 주로 국방·정보기관·공공안보 영역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밑에 깔린 우려의 본질은 제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보기관의 데이터 구조(인물·단체 간 관계)를 외산 플랫폼에 맡길 수 없듯, 제조 기업의 가장 핵심 보안 자산인 부품구성표(BOM)와 공정 레시피 간의 인과관계 체계 역시 외부 플랫폼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조 현장의 도면 설계 정보, 원가 구조, 공급망 흐름은 개별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국가 제조 경쟁력과 직결된 안보 자산이기에, 이 질문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독자적인 '온톨로지 소버린'이 필요한 이유
이것이 바로 자체 기술 기반의 'K온톨로지'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온톨로지 소버린(Sovereign:기술·데이터 주권)'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이유다. AI 시대에는 단순한 데이터 축적보다, 데이터의 뼈대를 세우고 맥락을 규정하는 온톨로지의 주도권이 국가와 기업의 운명을 가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제조업, 특히 설계 자산을 보유한 기업에는 분명한 기회가 있다. 온톨로지의 골격은 결국 '무엇이 무엇과 관계를 맺는가'를 정의하는 작업인데, 그 관계의 상당 부분은 이미 설계(CAD) 데이터 안에 긴밀하게 구조화되어 존재한다. 부품과 부품, 부품과 공정, 공정과 설비의 관계는 도면과 BOM이 만들어지는 순간 이미 정의되어 있다. 이 튼튼한 설계 골격에서 출발해 현장 데이터를 온톨로지로 정렬해 나가는 접근은, 설계 자산 없이 현장 데이터만으로 온톨로지를 바닥부터 쌓아야 하는 외산 솔루션보다 훨씬 유리한 출발점을 갖는다.
기술 종속국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가진 설계 자산 위에서 스스로의 제조 데이터 주권을 세울 것인가. 대한민국 제조업은 지금 그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박승훈 위즈코어 대표이사 paul@cadi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