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콘텐츠가 대접받는 방송통신 시장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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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일 한국방송채널진흥협회 회장.

전 세계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예능에 열광하고 있다. 'K콘텐츠'라는 브랜드는 어느덧 국가 경쟁력을 상징하는 핵심 자산이 됐다. 하지만 화려한 글로벌 성취라는 겉모습과 달리, 그 콘텐츠를 탄생시키는 토양인 국내 방송 산업의 근간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K콘텐츠가 밝힌 영광의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방송콘텐츠 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

고품질 방송콘텐츠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과 인력 그리고 기술이 필요하다. 모두 돈과 직결되는 요소들이다. 물론 저예산으로도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는 있지만 가성비 콘텐츠의 성공은 매우 예외적이다. 대체로 재원이 많이 투입된 작품일수록 흥행 확률이 높고, 넷플릭스가 국내 영상 콘텐츠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이 같은 경향은 일반화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방송콘텐츠 시장을 떠받치는 PP와 지상파방송 사업자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주요 수익원인 방송광고 매출이 지난 10년 사이 1/3이나 증발했다. 광고 수익이 급감하자 방송사들은 제작비를 절감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과는 확연하게 줄어든 드라마 제작 편수로 나타난다.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올 기회가 줄어들고, K콘텐츠 생산 엔진이 천천히 멈춰가는 위험한 징조다.

제작 재원의 감소는 콘텐츠 사업자와 유료방송 플랫폼 사업자 간의 갈등도 심화시켰다. 갈등의 본질은 방송 수신료의 부적절한 배분 구조에 있다. 현재 한국의 방송 생태계는 이동통신사가 운영하는 IPTV가 주도하고 있다. 작년 말 정부가 공개한 유료방송 가입자 수 통계에 따르면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3사와 각 계열사들의 유료방송 가입자 점유율은 약 80%에 달한다.

문제는 IPTV가 시장을 석권하는 과정에서 방송콘텐츠를 이동전화 결합 상품의 '경품'처럼 취급했다는 점이다. IPTV 성장 초기에 이동전화 다수 회선을 결합하면 IPTV 방송을 공짜로 끼워 주는 마케팅을 펼치면서 소비자들에게 '방송은 공짜'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콘텐츠 가치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수익 배분 구조 역시 기형적이다. 웹툰, 음원 등 타 산업에서는 권리자가 플랫폼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지만, 유료방송 시장에서는 여전히 IPTV 사업자가 수신료 수익의 과도한 비중을 점유하고 있다.

콘텐츠 사업자들의 정당한 가치 인정 요구에도 IPTV 사업자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최근에는 통신사들이 미디어 사업 부문을 축소하거나 결합 상품의 핵심을 OTT로 옮기는 등 방송 상품을 더욱 소홀히 대하고 있다. 방송콘텐츠가 여전히 K콘텐츠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제라도 방송 상품의 가치를 제고하고 투자 재원이 원활히 유입되도록 상생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방송콘텐츠에만 적용되는 시대착오적인 광고·편성·심의 규제를 과감히 혁신해 글로벌 OTT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규제 개선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내 방송콘텐츠 산업 진흥 업무 전담 부서를 정비하고, 청와대에 '콘텐츠 미디어 수석'을 신설해 콘텐츠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해야 한다.

방송콘텐츠 업계에서 일하는 동료와 선후배들 사이에 “우리 산업이 과연 몇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K콘텐츠 강국이라는 명성이 허울에 그치지 않도록, 이제는 산업의 뿌리를 살리기 위한 국가적 결단이 필요한 때다. 오늘의 우려가 훗날 기우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백승일 한국방송채널진흥협회 회장 baekster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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