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칼럼]블록체인 산업 발전을 위한 국가 로드맵은 있는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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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

블록체인의 본질은 데이터의 신뢰를 확보하는 데 있다. 따라서 부동산 등기, 공공 조달, 전자문서, 의료 기록, 학력·자격 증명, 복지 지급 내역 등 위·변조 방지가 중요한 영역에 적용 가능성이 크다.

에스토니아는 국가 행정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반 보안 구조를 도입해 디지털 정부의 신뢰를 높인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한국도 전자정부 경쟁력이 높은 나라지만, 행정 데이터의 신뢰성과 추적 가능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블록체인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신원 인증과 공공 증명서 분야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표적 적용 사례가 될 수 있다.

산업별 전략도 필요하다. 블록체인은 모든 산업에 똑같이 적용되는 만능 기술이 아니다. 물류에서는 공급망 추적과 통관 문서 관리에 유용하고, 콘텐츠 산업에서는 저작권 관리와 창작자 보상 구조를 개선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게임 산업에서는 아이템 소유권과 이용자 참여 경제를 설계하는 데 쓰일 수 있고, 에너지 산업에서는 개인 간 전력 거래나 탄소배출권 관리에도 적용 가능하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K콘텐츠, 게임, 핀테크 같은 강점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 로드맵은 이 강점 산업과 블록체인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짜여야 한다.

예컨대 K콘텐츠 분야에서는 블록체인 기반 저작권 관리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다. 음악, 웹툰, 영상 콘텐츠의 이용 이력을 투명하게 기록하고, 창작자와 제작사, 유통사가 수익 배분을 자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콘텐츠 생태계의 신뢰가 높아질 수 있다. 물류 분야에서는 수출입 서류, 원산지 증명, 운송 이력을 블록체인으로 관리해 무역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배터리 산업에서는 원재료 조달부터 생산, 재활용까지의 이력을 기록해 공급망 투명성과 ESG 대응력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블록체인이 추상적 기술이 아니라 실제 산업 경쟁력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재와 연구 생태계 역시 국가 로드맵의 핵심 축이어야 한다. 블록체인은 단순한 앱 개발 기술이 아니다. 암호학, 분산 시스템, 보안, 금융공학, 법률, 경제 인센티브 설계가 결합된 복합 기술이다. 따라서 단기 교육 프로그램만으로는 산업을 이끌 전문 인력을 충분히 양성하기 어렵다.

대학, 연구기관, 기업이 공동으로 장기 연구센터를 운영하고, 국제 표준화 기구와 오픈소스 생태계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기술을 사용하는 국가와 기술 규칙을 만드는 국가는 다르다. 한국이 후자가 되려면 기초 연구와 표준 경쟁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결국 블록체인 산업 발전을 위한 국가 로드맵은 몇 가지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블록체인을 가상자산 거래 문제로만 보지 않고 디지털 신뢰 인프라로 재정의해야 한다. 둘째, 규제는 금지 중심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셋째, 금융·공공·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대표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한국의 강점 산업과 결합한 특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다섯째, 인재 양성과 국제 표준 참여를 통해 장기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블록체인을 둘러싸고 기술 경쟁이 아니라 제도 설계 경쟁을 벌이고 있다. 누가 더 많은 코인을 발행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자산 시장과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느냐가 중요해졌다. 한국은 기술력, 금융 인프라, 콘텐츠 경쟁력, 제조업 기반을 모두 갖춘 나라다. 문제는 역량의 부족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방향으로 묶는 국가 전략의 부족이다.

블록체인 산업의 미래는 이미 시작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기대도, 과도한 경계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명확한 비전과 실행 가능한 로드맵이다. 국가가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이 혁신을 실험하며, 규제가 시장 신뢰를 뒷받침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블록체인은 투기의 상징이 아니라 한국 디지털 경제의 새로운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

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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