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칼럼]호르무즈, 공급망 리스크와 E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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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2011년 국내 대기업에 근무하던 시절, 영국 런던의 'LCL(Low Carbon London) 프로젝트' 참여를 위해 런던시 공무원과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다. 조건 차이로 협상은 결렬됐지만, 잠시 쉬는 시간에 런던 시 공무원과 협상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당시 우리나라는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를 추진 중이었고, 필자 스스로 그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지만 스마트그리드가 왜 필요한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런던은 왜 이를 추진하느냐고 묻자, 상대방의 답은 의외로 다른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북해 유전이 이미 정점을 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북해 유전의 생산량이 줄어들면, 영국이 앞으로 러시아산 가스와 중동산 석유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며, 이는 21세기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리스크가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일정 비율 이상을 국산 에너지, 즉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는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스마트그리드가 필수라는 논리였다. 이 짧은 설명은 이후 국제 정세를 통해 그대로 입증됐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의 에너지 시장이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고, 최근 호르무즈 해협 통제 역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다시 한 번 뼈 아프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공급망 문제는 2010년 일본과 중국 사이의 분쟁과 희토류 수출 통제 사건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이후 특정 국가에서 타 국가와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희토류 등 핵심광물을 전략적 무기로 반복해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핵심광물은 전기차 배터리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설비와 같이 에너지 전환을 이루는데 성능과 가격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그러나 첨단산업과 에너지 전환을 위한 공급망은 여전히 특정 국가에 집중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기술이나 제품의 경제성은 기존 시스템과의 적합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아무리 우수한 기술이라도 기존 인프라와 시장 구조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매우 예외적으로 초기의 스마트폰은 첨단 기술제품 기존 시장의 논리를 뛰어 넘는 파괴적 혁신으로 판을 바꾸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하며, 여러 필연과 우연이 만나면서 현재의 시스템 자체가 외부적인 도전에 직면하면서 기존 시스템에서 소외됐던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급작스럽게 부상하는 것도 관찰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며 국내 에너지 및 석유화학 산업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만약 재생에너지, 바이오연료, 바이오플라스틱이 일정 수준 이상 보급돼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충격이 발생했을까? 핵심광물 역시 환경 및 인권문제가 심각한 국가의 공급망 리스크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현재처럼 특정국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가 되었을까?

환경·사회·지배구조(ESG)경영은 흔히 사회공헌이나 윤리경영, '착한 경영'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본질은 전혀 다르다. 화석연료와 핵심광물의 채굴, 수송, 정제, 생산 과정 전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 사회, 환경적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식별하고 대응하는 것이 ESG경영이다. 그리고 ESG공시는 이러한 리스크 대응 역량을 투자자에게 투명하게 전달하는 수단이다.

과거 오일쇼크가 기업과 국가의 전략을 바꿔놓았듯, 오늘날의 에너지 및 공급망 위기 역시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ESG경영이나 ESG공시가 마치 반기업정서에 빠진 환경주의자나 비정부기구(NGO)의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ESG는 현재의 시스템이 지속가능하지 않고 급변할 가능성에 대한 리스크 관리 및 위기 대응 수단임을 인식해야 한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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