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묶였는데 비축유 90만배럴 '증발'…정부 “정유사 수출제한 검토”

Photo Image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 전경. 석유공사 제공

국가 비상사태를 대비해 보관 중이던 국제공동비축 원유 90만배럴이 한국석유공사의 늑장 대응으로 해외로 팔려나갔다. 정부는 석유공사에 대한 긴급 감사에 착수하는 한편, 국내 기름값 인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정유사 수출제한 조치까지 검토하는 등 전방위 비상 대응에 나섰다.

22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해외기업 A사는 울산 석유 비축기지에 보관 중이던 국제공동비축 원유 90만배럴을 해외로 판매했다. 석유공사가 우선구매권을 즉시 행사하지 않으면서다. 국제공동비축 사업은 산유국 등 해외기업의 석유를 석유공사의 유휴 비축시설에 유치하고, 비상시 우선구매권을 행사해 국내 수급 안정에 기여하는 제도다. 산업부는 최근 미국·이란 전쟁으로 원유 수급 차질이 빚어지자 우선구매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이미 물량이 유출된 뒤였다. 90만배럴은 우리나라 전체가 8~9시간가량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산업부는 즉각 감사에 착수해 규정 위반이 밝혀질 경우 엄중히 문책하겠다는 방침이다.

내부 수급망에 구멍이 뚫린 사이, 외부 여건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직전 극적으로 해협을 빠져나온 유조선 '이글 벨로어'호가 20일 오후 충남 서산 대산항에 입항했다. 한국의 하루 소비량과 맞먹는 약 200만배럴의 원유를 실은 이 유조선을 끝으로, 4월 국내 정유사들의 입항 스케줄은 사실상 비어 있는 상태다.

정부는 초강경 통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문신학 산업부 차관은 “상황이 급해지면 정유사들의 수출 물량을 줄이는 수출제한조치나 수급조정 명령을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오는 27일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에 따른 2차 최고가격이 발표되면 국제 가격 상승분이 반영돼 주유소 기름값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부연했다. 정부는 차량 5부제 등 수요 관리 조치 도입도 검토 중이다.

국가 비축유의 실질적인 대응 능력 역시 한계를 드러냈다. 현재 정부와 민간이 보유한 비축유는 약 1억 9000만배럴로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준 208일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 차관은 “모든 경제활동을 뒷받침하는 평시 기준(BAU)으로는 208일이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 국내 하루 석유 소비량(약 250만~280만 배럴)으로 단순 환산하면 실질 대응 기간은 68~76일에 불과하다.

정부는 비축유 방출을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둔 채, 아랍에미리트(UAE) 긴급 확보 물량 반입을 서두르고 4년 만에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타진하는 등 사활을 걸고 있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