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커머스 강국이다. 최근 비자(Visa)가 아태지역 14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 10명 중 8명(77%)이 월 2~3회 이상 온라인 쇼핑을 이용한다고 답해 아태지역 고소득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2위인 대만(68%)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고도화된 배송 인프라와 효율적인 국내 간편결제 환경을 바탕으로 한국의 소비 시장은 그 어느 곳보다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 속에서 커머스 산업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기존의 단순 검색 중심이던 디지털 커머스가 진화하며, 이제는 인공지능(AI) 도구를 활용한 쇼핑 경험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앞서 본 비자 조사에 따르면 아태지역 소비자의 74%가 이미 AI 기반 도구를 상품 탐색과 주문 추적 등에 활용하고 있을 만큼 쇼핑 과정에서 AI 활용은 일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변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단순히 소비자의 취향을 분석해 상품을 추천하는 단계를 넘어, 소비자가 설정한 조건에 맞춰 상품 탐색부터 구매와 결제까지 스스로 수행하는 '에이전틱 커머스(Agentic Commerce)'로 빠르게 진화 중이다.
맥킨지(McKinsey)는 2030년까지 에이전틱 커머스가 견인할 전 세계 소비자 거래 규모가 약 3조~5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정KPMG 역시 AI 에이전트가 상품 탐색, 비교, 추천, 구매, 결제까지 쇼핑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이른바 '제로 클릭(Zero-Click)' 쇼핑 환경이 등장하고 있으며, 상거래의 중심 접점이 기존 플랫폼에서 AI 에이전트로 이동하는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소비자가 플랫폼이 제시하는 상품을 고르던 플랫폼 쇼핑의 시대가 저물고, AI가 주도하는 에이전틱 커머스로의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국경 간 거래(Cross-border) 관점에서 에이전틱 커머스는 한국의 글로벌 시장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뷰티, 패션, 식품 등 K상품에 대한 해외 수요가 높은 국내 중소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호주에 거주하는 소비자가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건 화장품을 찾아 줘'라고 요청하면, AI 에이전트는 소비자가 설정한 조건은 물론 기존에 축적된 피부 유형과 구매 이력까지 반영해 적합한 상품을 탐색한다. 이어 리뷰와 성분 정보를 꼼꼼히 비교한 뒤, 소비자가 설정한 가격 범위 안에서 최적의 상품을 선택해 안전하게 결제까지 완료한다. 이처럼 AI 에이전트는 신뢰할 수 있는 한국 판매자를 식별하고 다양한 상품을 비교한 뒤 안전한 결제를 통해 국경 간 구매를 수행함으로써, 해외 소비자들이 언어 장벽이나 상품 탐색, 결제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대폭 줄여줄 수 있다. 한국 판매자 입장에서도 막대한 수수료를 내고 해외 플랫폼에 입점하거나 고비용의 글로벌 마케팅을 집행하지 않아도, AI 에이전트라는 새로운 연결 고리를 통해 글로벌 수요에 맞는 상품을 보다 효율적으로 판매할 수 있어 해외 진출의 장벽을 크게 낮추는 계기가 된다.
다만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판매자와 소비자를 위한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해외 소비자가 AI에 구매 결정을 맡기기 위해서는 결제와 데이터 보안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한국 판매자 역시 이러한 신뢰가 반복적이고 원활한 거래로 이어질 때 비로소 글로벌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결국 신뢰는 에이전틱 커머스의 필수 조건일 뿐 아니라, K상품에 대한 글로벌 관심을 한국 기업의 지속 가능한 해외 성장으로 연결하는 핵심 기반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속도와 소비자의 신뢰 수준 사이에는 여전히 좁혀야 할 간극이 존재한다. 특히 돈이 오가는 결제의 순간에서는 소비자들이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위 비자 조사에 따르면, 아태지역 소비자의 32%가 쇼핑 과정에서 AI 활용 시 개인정보 및 결제 데이터 공유에 우려를 나타냈고, 45%는 '결제 보안'에 대한 확신이 전제될 때 에이전틱 커머스를 수용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기술 혁신 속도에 발맞춘 강력한 신뢰 인프라 구축이 시급함을 보여준다.

보안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가운데, 한국 시장의 결제 보안 인식은 짚어볼 만한 대목이다. 한국은 선불 충전금, 원클릭 결제 등 다양한 카드 비대면(Card Not Present; CNP) 결제가 발달한 편의성 중심의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각 결제 방식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보안 신뢰도는 10%대 안팎에 머물러 아태지역 평균(약 20%)을 밑돌았다. 또, AI 활용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한국 소비자의 90% 이상이 향후 AI 어시스턴트 및 챗봇을 상품 탐색에 활용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지만, 실제 구매 단계에서 이를 활용하겠다고 답한 비율은 38% 수준에 그쳤다. 이는 한국 소비자들이 기술 활용에는 적극적이지만, 구매와 결제라는 핵심 거래 단계에서는 신뢰를 매우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뢰할 수 있는 결제 네트워크와 강력한 보안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기술 혁신만으로는 새로운 커머스 경험이 확산되기 어렵다.
결국 커머스 경쟁력의 핵심은 단순한 속도나 편의성을 넘어, 소비자가 얼마나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술이 바로 '토큰화(Tokenization)'다. 토큰화는 온라인 결제 시 실제 카드 번호나 계좌 정보 대신 고유한 암호화 토큰을 생성해 거래를 처리함으로써 민감한 데이터의 유출을 원천 차단한다. 여기에 생체인증 기반의 '페이먼트 패스키(Payment Passkeys)' 기술을 더하면, 소비자는 복잡한 인증 절차 없이도 높은 수준의 보안을 경험할 수 있다. 다만 앞서 살펴본 비자 조사 결과 아태지역 평균 토큰화 인지도는 25%, 한국은 17%에 불과해 향후 업계 차원의 적극적인 기술 도입과 소비자 인지도 제고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비자는 AI 에이전트가 주도하는 상거래 환경에서도 소비자가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소비자·AI 에이전트·가맹점을 안전하게 연결하는 신뢰 레이어인 '비자 인텔리전트 커머스(Visa Intelligent Commerce)'와 거래의 투명성과 신뢰를 보장하는 '트러스티드 에이전트 프로토콜(Trusted Agent Protocol)' 등 차세대 결제 신뢰 기반을 선제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에이전틱 커머스는 이제 개념의 단계를 넘어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다. 아태지역 대부분의 시장에서 에이전틱 커머스는 이미 상용화되었거나 시범 운영 및 개발 단계에 진입해 있다. 비자는 에이전틱 커머스가 한국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국내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고 성공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비자의 역할은 한국의 생태계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하여 이 새로운 시대가 신뢰라는 토대 위에 안착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에이전틱 커머스에서의 리더십은 단순히 혁신의 속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금융, 기술, 유통 산업 간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얼마나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거래 환경을 구축하느냐가 성패를 가를 것이다.
패트릭 스토리 비자 코리아 사장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제학 학사, 금융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비자(Visa)에 입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법인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해왔다. 비자의 비즈니스 기획 및 운영과 컨설팅 및 애널리틱스를 차례로 총괄했으며, 소비자 금융, 결제, 정보 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 비자 코리아 사장으로 취임 후 카드사, 핀테크기업, 유통업계들과 협업하며 한국에 혁신적인 결제 및 데이터 솔루션을 도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