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술경쟁은 이제 '속도전'…중국이 먼저 규칙을 바꾸다

기술 패권 경쟁의 본질은 기술 그 자체라기 보다는 누가 더 빨리 국가전략기술을 딥테크 챔피언기업으로 만들어 시장 질서를 바꾸는지의 시간을 선점하는 속도전이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가 설파한 것처럼 속도의 경제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속도는 권력이고 기술 격차보다 시간 격차가 더 치명적인 시대다.
뉴욕타임즈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댄 왕(Dan Wang)의 '브레이크넥(BREAKNECK)'은 중국의 경쟁력을 질식할 정도로 빠른 국가 단위 초고속 실험 시스템으로 규정하며, 도시 전체를 실험장으로 만들어 개발·제조·대규모 엔지니링·현장배치를 하나로 묶은 '시장배치 우선의 엔지니어링 국가(Engineering State)'라고 평가한다.
기존 미국·유럽식 연구-규제-시장의 직선형 혁신모델과는 다른 실험-배치-조정-확장의 순환형 초고속 혁신모델이다. 전략기술, 특히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바이오, 첨단제조의 상용화를 세계에서 가장 빨리 실현하는 국가가 됐다.
일례로 '차이나 스피드' 전략을 대표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양산 세계 1위 회사인 애지봇(Agibot)은 신제품을 시장에 먼저 던져놓고 피드백과 데이터를 통해 성능을 개선하는 '초(超)단기 신제품 주기' 전략으로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이 다음으로 지배할 산업은 로보택시와 바이오 신약이라고 진단하면서 베이징·상하이·우한 등은 이미 완전 무인 로보택시가 일상화됐고, 혁신 신약 파이프라인 규모는 세계 최고 임상 허가 속도에 힘입어 세계 2위로 26.7%가 중국발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은 이커머스 AI 물류기술 연구개발(R&D)에만 5년이 걸리는데 중국은 상용화까지 1년 안에 끝낸다는 국내 언론보도 또한 섬뜩하다.
◇미국의 반격…ASAP, 제네시스 미션이 제시한 '미국판 속도전'
미국도 지난 6월 상원의 초당적 과학혁신 시스템 재설계 이니셔티브로 'American Science Acceleration Project(ASAP)'를 추진하고 있다. 기존 연방 R&D 구조와 속도가 국가 경쟁력과 안보를 위협한다고 진단하면서 2030년까지 과학 상용화에 소요되는 10년 이상 기간을 10배 단축하는 변혁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데이터 플랫폼, 컴퓨팅 인프라, AI 역량, 협력생태계, 프로세스 혁신을 기반으로 속도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를 더욱 구체화한 행정명령 제네시스 미션(Genesis Mission)은 연방 연구 데이터, 슈퍼컴퓨팅, 국립연구소, 민간 기업과 학계를 하나의 AI 기반 통합 플랫폼으로 묶고, 과학적 발견에서 적용·배치까지 걸리는 시간을 구조적으로 단축해 10년 내 과학과 공학 투자 생산성과 영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21세기판 맨해튼 프로젝트로 부르며 중국을 상대로 한 기술패권 경쟁의 최우선 국가전략으로 위치시켰다.
이러한 추세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다. 기술 패권 경쟁 본질이 발명(Discovery)에서 속도(Speed)로 이동했으며, 국가 경쟁력은 연구가 축적되는 속도가 아닌 연구가 시장과 산업으로 연결되는 속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딥테크 챔피언 부재'
우리가 성장한계에 봉착한 주요 원인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 전략기술로 시장을 재편하는 딥테크 챔피언 기업이 너무 적고, 너무 늦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딥테크 챔피언 부재는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 설계 문제다.
우리가 전략기술 경쟁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은 있지만, 산업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병목을 목표로 한 집중 설계가 부족했고, 인내 자본으로 버텨줄 구조가 없었으며, 공공 연구 성과를 끝까지 산업 지배력으로 끌고 가는 실행 체계가 부족했다. R&D-연구성과 이전-창업-투자-규제 흐름이 분절된 구조에서는 결코 챔피언으로 키워 낼 속도를 만들 수 없다.
◇속도는 의지 아닌 설계 문제
속도관점에서 초기부터 챔피언 창출을 통한 시장선점이나 개편을 목표로 한 실행 전략과 총력지원구조가 필요하다.
네덜란드의 ASML은 산업을 지배하는 딥테크 챔피언의 교과서적 사례다.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지배력은 우연이 아니다. 장기 공공 연구 투자, 단기 수익을 요구하지 않은 인내 자본, 수요기업의 리스크 분담, 초기부터 대체 불가능한 병목을 만들어 산업구조를 혁신한다는 명확한 목표와 전략적 집중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병목 그 자체가 되었다.
◇성장 가속 관건은 '성장자본과 결단의 속도'
딥테크 챔피언을 빠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성장자본 구조 역시 달라져야 한다. 단기 수익을 요구하는 자본은 기술 성숙과 시장 형성까지 최소 10년 이상 걸리는 딥테크 기업을 구조적으로 배제한다. 한국의 문제는 자본 규모도 경쟁국 대비 과소하지만 자본이 작동하는 규칙이다.
실패를 전제로 설계되고, 지속적 성장 가속 구조를 갖춘 장기·대규모·연속투자가 가능한 전략 목적형 인내 자본이 필요하다. 위험을 줄이려는 분산 지원으로는 결코 딥테크 챔피언을 만들 수 없다. 현행 모태펀드처럼 기업을 갈아타며 투자하는 구조로는 딥테크 챔피언이 나오기 어렵다. 선택된 전략기술을 기준으로 시드-스케일업-상용화까지 이어지는 연속 투자 구조를 제도화해야 한다.
정부에서 조성 중인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나 모태펀드는 민간 자본이 감내하기 어려운 장기·고위험 영역에서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고, 국가 전략 산업에 대한 위험을 분담함으로써 민간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설계된 자본이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이 자본이 어떤 규칙 아래에서 작동하느냐다. 만약 국민성장펀드를 기존 모태펀드 방식--단기 회수 중심, 분절된 펀드 구조, 기준수익률(IRR) 위주 평가로 운용한다면, 사실상 골든타임 마지막 실탄이 될 이 펀드는 몇몇 성공 사례를 남긴 채 빠르게 소진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자금을 동일 규칙으로 운용하려는 순간 딥테크는 다시 주변부로 밀려난다.
반대로 운용 규칙을 바꾼다면 국민성장펀드는 단발성 정책 자금이 아니라, 딥테크 챔피언을 지속 배출하는 구조적 엔진으로 순환 자본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국민성장펀드 내부에 딥테크 전용 모험 트랙을 별도로 설계하는 것이다.
이 전용 트랙은 15~20년 만기를 기본으로 하며, 연속 투자와 실패 허용을 전제로 설계돼야 한다. 펀드 출자 비율을 매우 높여주고 기준수익률을 낮춰주는 한편, 운용 주체도 일반 금융 중심 GP보다는 기술과 산업구조를 이해하는 성장중심 공공기술사업화 전문회사 중심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성과 평가 역시 IRR 중심 지표에서 벗어나 산업 병목 돌파 여부, 상용화까지 걸린 시간 단축, 후속 민간 자본의 레버리지 효과 등 속도와 구조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
아울러 스타트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파일럿·양산·허가·조달이 필요한 구간에서는 한시적 프로젝트 특수목적회사(SPV)를 설립해 국민성장펀드와 결합시키고 자본, 규제 대응, 조달, 책임을 하나의 구조로 묶어 가속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성공의 성과는 지분, 로열티, 혁신조달 계약을 통해 다시 국민성장펀드로 환류시키면 선순환구조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국민성장펀드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는 딥테크 추격국에 머물 수도, 다음 산업 질서를 설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도 있다.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다.
◇전략기술의 목표는 연구 성과가 아니라 '시장 재편'
기술주권은 국가가 전략기술 개발·활용·통제역량을 스스로 보장하는 것(OECD, 2021)이다. 따라서 국가 전략기술 확보는 최고·최초 연구 성과를 축적하는 것을 넘어 시장에 투입되는 속도와 시장·산업영향력으로 재정의해야 하며, 딥테크 시대 국가 경쟁력은 '국가 전략기술×속도×챔피언 기업=시장 지배력'이라는 구조를 견지해야 한다. 한국의 직면한 최대 과제는 공공기술이 연구실에 머무르는 관성을 깨고, 사업화 속도 중심으로 전면 개편한 '공공기술 신속 사업화 총력지원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연구, 부처,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기업, 투자 체계를 분절적으로 관리하는 기존 R&D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혁신-배치를 하나의 시간축으로 통합해 연속흐름과 병행추진으로 묶는 경제·사회적 가치중심의 R&I 체계로 전환함으로써 미국처럼 기술상용화속도와 성공률을 10배 이상 높이는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특히 자금과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성장 구간(양산·인증·신뢰성 단계)을 최대 도전과제로 설정해 실증 인프라·선구매 계약·시장확약·장기 인내 자본을 패키지로 묶는 기술검증(Lab)-실증(Fab)-산업 전환을 가속해야 한다.
유럽연합(EU)은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의 보고서를 통해 유럽 연구자들이 생성한 최고의 과학지식 상당 부분이 상업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혁신에서 사업화, 스케일업으로 이어지는 통합 파이프라인 구축을 핵심 전략으로 제시했으며, 유럽혁신위원회(EIC) 혁신펀드와 전용 민관 공동 스케일업 펀드를 조성해 신속 사업화를 도모하고 있다.
속도를 잃은 R&D는 가장 비싼 재정이다. 실패는 늦게 드러나고 성공은 확장되지 않고 매년 같은 실험을 반복하는 구조가 가장 비싼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분절된 현행 정부·공공연구기관의 R&D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국가 전략기술 승부는 연구실에서 판가름 나지 않는다. 한국의 과제는 더 많은 연구가 아니라 더 빠르게 딥테크 챔피언을 만들어 공급망 해결과 시장의 판을 바꾸는 것이다. 그 순간 승패가 결정된다.
OPEC 의장을 지낸 야마니의 말처럼 석기시대는 돌이 부족해서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다. 오늘의 위기 역시 기술 부족이 아니라 기술을 산업으로 전환하는 속도의 문제다.
◇국격은 속도에서 나온다
기술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속도의 시대이다. 속도를 쥔 국가가 패권을 갖고, 그 속도가 국격을 만든다. 2011년 6월 카네기멜론대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국방장비 개발을 통상 10년에서 4개월 만에 완성한 소기업 로컬 모터스 사례를 언급하며 속도(Collapse the pace)가 국가 경쟁력, 납세자 가치, 글로벌 혁신 리더십이라 역설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이며, 단순히 변화하는 시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를 설정한다. 우리는 혁신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이끌고 있다”고 강조했다.
속도 전쟁 시대에 큰 울림으로 들려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추격, 추월, 추락의 대전환기, 대한민국에 속도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절대 조건이며, 국격은 속도에서 나온다. 속도를 설계하는 국가만이 다음 시대 문을 가장 먼저 열 수 있다. 한국판 ASAP와 제네시스 미션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치호 한국과학기술지주(KST) 대표 chchoi@kstholdings.co.kr
2014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술사업단장과 서울홍릉강소특구단장을 역임했다. 2017~2020년에는 한국연구소 기술이전협회(KARIT) 회장을 지내며 공공기술 이전 및 사업화 전문가로 평가된다. 2010~2017년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지식재산전문위원회 위원, 국가과학기술심의회 평가전문위원회 위원과 정책조정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관련 정책 강화에도 기여했다. 2023년 4월부터 한국과학기술지주(KST) 대표직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