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칼럼]CBDC, 성급한 도입은 위험하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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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

바하마는 전혀 다른 접근을 택했다. 인구가 여러 섬으로 흩어져 있어 은행 점포 접근이 어려운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바하마 중앙은행은 금융 포용을 목표로 삼고 2020년 '샌드달러(Sand Dollar)'를 도입했다. 도입 과정은 매우 신중했다. 먼저 엑수마(Exuma) 섬 등 제한된 지역을 대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운영해 실제 사용자 경험을 관찰했다. 이후 문제점을 수정한 뒤 점차 전국으로 확대했다. 샌드달러의 설계는 명확한 정책 목표에 기반했다. 금융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 주민에게 기본적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를 위해 상업은행과 전자지갑 사업자들이 참여하는 민관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또, 고령층이나 디지털 취약계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카드형 지갑을 병행해 제공했다. 덕분에 샌드달러는 초기 단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다만 2022년 말 기준 샌드달러 유통액은 전체 화폐 유통량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상인들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바하마의 실험은 '작은 성공'으로 기록되었다.

미국, 나이지리아, 바하마의 세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CBDC 도입의 조건과 결과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세계 금융 패권을 가진 나라임에도, 프라이버시와 금융 안정성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이유로 멈췄다. 나이지리아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으려는 조급함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뛰어들었다가 국민 신뢰를 잃고 실패했다. 반면 바하마는 분명한 정책 목표와 단계적 시행, 민관 협력을 통해 제한적이지만 안정적인 도입을 이뤄냈다. 세 사례가 공통으로 던지는 교훈은, CBDC는 단순한 화폐 기술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를 관통하는 과제라는 점이다. 특히 정책 목표가 불분명하거나,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거나, 금융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한국이 CBDC 도입을 검토할 때는 위 세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먼저, 프라이버시 보호는 반드시 제도적·기술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소액 거래에는 가명성 혹은 익명성을 보장하고, 정부가 데이터에 접근할 때는 법원의 절차를 반드시 거치도록 해야 한다. 금융 안정성 장치도 필수적이다.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CBDC 한도를 설정하거나 초과분에 불리한 금리를 적용하는 방법이 고려될 수 있다. 또한 위기 상황에서는 한국은행이 은행에 즉각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백스톱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책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바하마처럼 금융 소외 계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 단순히 “세계가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접근은 위험하다.

이를 보다 쉽게 그려보기 위해, 바하마 샌드달러를 한국 상황에 대입한 시나리오를 상상해보자. 정부는 제주도나 도서 산간 지역처럼 은행 점포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을 선정해 시범사업을 시작한다. 교통비나 전기요금을 CBDC로 납부할 수 있도록 연계하면서, 금융 소외 계층 해소라는 정책 목표를 명확히 제시한다. 민간은행과 핀테크 기업은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는 데 주력한다. 예컨대 카카오뱅크, 토스, 시중은행이 협력해 지갑 앱을 제공하고, 편의점 단말기에서 카드처럼 간편하게 CBDC 결제가 가능하도록 한다. 상인들은 별도의 비용 부담 없이 가맹점에 참여할 수 있다. 시민은 단순한 이용자가 아니라 참여자다. 고령층은 카드형 지갑을 활용해 쉽게 접근하고, 젊은 층은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한다. 주민 모임이나 설명회를 통해 불편사항을 정부와 은행에 피드백한다. 이 시나리오는 정부·민간·시민의 역할이 어떻게 분담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CBDC 도입은 단순한 기술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자유, 금융 안정, 사회적 신뢰, 정책 목표가 얽힌 복합적 과제다. 미국의 포기, 나이지리아의 실패, 바하마의 시도는 모두 각기 다른 맥락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한국이 CBDC를 도입한다면, 이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충분한 준비와 장기간의 실험이 필요하다. 정부는 제도와 인프라를 설계하고, 민간은 혁신적 서비스를 제공하며, 시민은 참여와 감시를 통해 신뢰를 만든다. 이 세 주체가 유기적으로 협력할 때만 CBDC는 위험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 준비 없는 도입은 실패를 낳지만, 충분한 준비와 협력이 뒷받침된다면 CBDC는 미래 금융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다.

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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