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A 책임연구원은 최근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흔한 일이지만 이번은 유독 뼈 아팠다. 경쟁 기관 발표자의 발표 내용이 제안요청서(RFP)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업을 딴 것을 보고 A 책임연구원은 내용보다 '발표 기술'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국가 R&D 사업 선정 공정성을 두고 적잖은 말이 나오고 있다. 느슨하고 비전문적인 시스템 탓에 공정한 선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의견이다.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는 국가 R&D 사업은 막대한 국민 세금이 투입돼 수요 조사와 기획, 선정 평가, 중간 점검, 최종 평가, 사후관리 등 체계적인 관리가 시행된다.
그런데 수월성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일부가 사업을 독식하는 일이 있다는 의견이 전부터 제기돼 왔다. 현 정부가 제기했던 'R&D 카르텔' 논란과도 맥락이 같다.
다만 연구현장에서는 주된 원인을 현장이 아닌 '시스템'에서 찾고 있다. 평가 시스템 미비로 연구 내실보다는 발표 역량으로 사업을 따려는 '일부' 일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업을 진행하는 정부 부처가 전문성을 갖춘 평가자 풀을 충분히 확보하지도, 활용하지도 못한다는 주장이 잇따른다.
이에 대해 B 연구원은 “평가석에 앉은 이들의 폭이 상당히 제한적”이라며 “전문성이 뛰어나서 많이 기용되면 모르지만, 실제 아닌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실력보다는 정치력이나 인맥으로 평가 석상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새로운 영역이어서 종사자가 적은 경우, 아예 관련 없는 비전문가가 평가 석상에 서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다른 기관의 C 책임연구원은 관련 없는 분야 평가위원 참여를 종용받았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잘 모르는 분야 국가 R&D 사업 평가에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받아 거절했는데, '상관 없으니 그냥 해달라'고 해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며 “평가자 전문성을 믿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평가자 전문성이 낮으면 발표 외적인 부분에 경도될 가능성이 커진다. 사업 도전자들이 제안서 내용에 내실을 기하기 보다 발표의 디자인적 심미성, 화술 등에 치중할 수 있다.
'사업을 따오는 이(찍새)'와 '수행하는 이(딱새)'가 나뉘는 문제도 이 때 발생한다. 찍새는 과거 사무실을 돌며 구두를 받아오는 이들을, 딱새는 닦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전문 연구 수행과는 상관없는, 수주 작업에만 임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일부 특정 인사가 사업을 독식, 카르텔을 형성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를 부른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후배들이 연구 내용이 아니라 발표 방법을 고심하는 것을 보면 우리 과학기술 미래를 걱정하게 된다”며 “물론 연구현장에서도 자성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시스템 개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영준 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