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32〉6공화국 첫 과기처 장관에 이관 울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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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6일 청와대에서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누가 새정부 내각에 들어간데?”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겠어?”

1988년 2월 25일 제6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관가 최대 관심사는 단연 새 내각 구성이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 인사를 놓고 이곳저곳에서 자천타천의 하마평이 나돌았다. 부처마다 누가 장관으로 올지를 놓고 소문이 무성했다.

과학기술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부 승진설부터 외부 인사 명단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는 출처 불명의 소문에 불과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사는 발표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정부 인수 업무를 전담하는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를 통해 새 정부에서 일할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선 작업을 했다. 노태우 당선자는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늦어도 2월 중순까지 정부 조각 및 국정운영 기본계획의 대강을 수립하시오.”

당시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은 이춘구 민주정의당 의원이었다. 그는 육사를 14기로 졸업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해 사회정화위원장, 국회의원, 내무부 차관을 지냈다. 노 당선자가 내무부 장관 시절 차관으로서 호흡을 맞췄다.

어느 정부 건 가장 중요한 게 인사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사람쓰기에 있다”(爲邦在於用人)며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 “인수위 집무실로 출근하면서 새 정부의 조직 인선과 정국운영 구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또 '새 대통령상 정립을 위한 보고서'를 마련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대통령과 내각, 정당, 국회, 국민과의 관계 설정, 제6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국정운영 방향 등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런 일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순발력 있게 보필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따라서 비서실장을 정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의견을 구한 결과 홍성철씨가 적임자라고 했다. 그를 만나 나를 보필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기꺼이 응했다.”(노태우 회고록 상)

홍성철 비서실장은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후 1949년 해병대에 입대해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 부대에서 통역업무를 담당했다. 1962년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한 후 주미대사관 공사를 거쳐 국무총리 비서실장,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내무부 장관, 보건사회부장관 등을 역임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노태우 당선자는 비서실장 임명 후 조각을 위한 인선작업에 본격 나섰다. 정부 부처와 각 기관의 협조를 받아 광범위한 인사 자료를 수집했다. 이를 바탕으로 총리와 장관 후보자를 인물별로 분류하고 각종 참고자료와 대조하면서 적임자를 선정했다.

2월 11일 노 당선자는 새 정부의 국무총리에 이현재 전 서울대 총장을 내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노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 “국무총리 후보로는 3~4명으로 압축해서 올라온 자료들을 검토해 보니 모두 훌륭한 분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원칙 하나를 정했다. 안타깝더라도 내 고향인 대구·경북 출신은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제6공화국 초대 총리로 이현재 전 서울대 총장을 내정하고 나와 홍 실장이 그를 만나 승락을 얻어냈다.”

이현재 국무총리 내정자는 충남 홍성 출신으로,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공군사관학교 교수 등과 서울대 교수를 거쳐 부총장에 이어 총장을 지냈다.

강용식 준비위 대변인(전 국회의원)은 “새 총리가 경제이론에 밝은 경제학자이자 서울대 총장을 지내면서 젊은이들의 고민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고, 지성인이라는 점 등 경륜과 덕목이 새 정부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인사 배경을 설명했다.

국무총리 인사를 끝낸 노 당선자는 이현재 국무총리 내정자, 홍설철 비서실장 내정자, 이춘구 준비위원장 등과 함께 장관 인선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2월 19일 노 당선자는 제6공화국 행정부를 이끌 각 부처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을 확정, 발표했다. 이날 인사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나웅배 상공부 장관, 체신부 장관에 오명 장관을 재기용했다. 과학기술처 장관에는 이관 울산대 총장을 임명했다.

강용식 준비위 대변인은 “새 정부가 표방하는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이라는 목표와 부합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유능하고 덕망 있는 인물을 등용했다”면서 “과기처 등은 그 분야 전문가를 기용해 전문성을 중시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이관 과학기술처 장관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영국 리버풀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자력연구소 원자로공학연구실장을 거쳐 1970년 울산공대 초대 학장으로 부임했다. 1985년 종합대로 승격하자 울산대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과기처 장관에 발탁되기 전까지 18년 동안 이 학교에서 재임한 국내 최장수 학·총장 기록 소유자였다.

이 총장은 울산공대에서 남다른 학교 운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울산대 산·학 협동 시초가 된 영국 '샌드위치 시스템' 도입이었다. 이 시스템은 영국에서 산·학 협동의 한 방법으로 개발·보급한 것으로, 교육 후 일정 기간 기업체 실습을 받도록 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는 혁신적인 산·학 협동 시스템이었다.

또 모든 학생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필수로 가르치도록 했다. 개인용컴퓨터(PC)라는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1970년대에 컴퓨터 장비를 대량 구비, 실습을 의무화했다. 경북대, 부산대 등 지방 국립대 대학원생들이 실습을 위해 울산공대를 이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과학기술처도 이관 장관 발표 전까지 직원들이 저마다 정보 안테나를 동원하는 등 후임 장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과학기술처 고위 인사의 말. “그 무렵 후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권원기 당시 차관, 이관 울산대 총장, 박태원 인하대 총장, 채영복 한국화학연구소 소장 등이 후보자로 막바지까지 경합을 했다. 이들을 놓고 내부 논의를 거쳐 노 당선자가 2월 17일 심야회의에서 이관 총장을 최종 낙점했다고 들었다.”

문화공보부 장관도 처음에는 언론인이자 시인·평론가인 이어령 이화여대 교수에게 입각을 타진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고사했다. 1989년 7월 정부조직 개편으로 초대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이어령 교수는 “당시는 문화공보 행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고사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은 지성인 행정가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월 18일. 노태우 당선자는 이날 집무실에서 취임식준비위원회로부터 제6공화국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한 '새 대통령상 정립을 위한 보고서' 내용을 보고받았다.

보고서 내용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각료를 임명하기 전에 국무총리의 의견을 청취하는 절차를 관행화하고, 둘째 차관급 공무원 인사는 각부 장관의 의견을 존중하며, 셋째 차관 이하 임명장 수여는 국무총리에게 위임하고, 넷째 주 1회 국무총리와의 만남을 정례화해 국정 전반에 관한 상호 의견을 교환한다 등이었다.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은 13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뒤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이현재 국무총리서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이날 임명장 수여식은 형식이 기존과 달랐다. 수여식에서 그동안 사용하던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의 지시였다. 노 대통령은 새 각료들에게 두 손으로 임명장을 주고 새로운 의전 지침에 따라 취임 선서도 받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임명식이 끝난 뒤 신임 각료들과 청와대 본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관 장관은 임명장을 받고 이날 오전 11시쯤 과학기술처 상황실에서 200여명의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긍식 전임 장관과 함께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관 장관은 취임사를 통해 “2000년대 선진 10위권에 한국이 진입하려면 과학기술 투자액이 국민총생산(GNP)의 5%는 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정부가 지속적인 투자 확대를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2월 26일 오후 노 대통령은 6공화국 출범 첫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국정운영은 내각에 권한과 책임을 최대한 부여할 것”이라면서 “각 부처 장관은 소관업무에 대해 확고한 소신을 갖고 추진하되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로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자 국정 전반에 걸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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