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27〉통신혁명 횃불…전전자교환기(TDX) 개발에 240억원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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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1984년 4월 12일 한국전기통신연구소를 시찰, 전자교환기 등 개발 제품을 돌아보고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1970~1980년대 초등학교에서 학생 대상 가정 조사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질문이었다.

전화기는 그 당시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당시 전화기는 백색과 청색 두 종류가 있었다. 매매가 가능한 백색전화기는 서민주택 한 채 값과 맞먹었다. 전화기가 없는 서민들은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전화국으로 냅다 뛰어갔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당시 생활상이었다.

이 같은 전화 적체를 일거에 해소한 게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이다.

그러나 TDX 개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개발까지는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걸렸다. 1976년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해 1986년 전두환 정부에서 국산화에 성공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TDX 개발을 강력히 주장한 이는 당시 경제기획원 김재익 기획국장이었다. TDX 도입 타당성 검토는 과학기술처 산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서 담당했다. 검토 책임자는 경상현 박사였다.

정부는 '전자식 교환기 개발계획서'를 작성해 1976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았다. 그러나 10·26사태 등 정치 격변으로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5공화국 들어 TDX 개발을 추진했다. TDX 개발은 전두환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 증언. “나는 1981년 5월 오명 비서관을 체신부 차관으로 보내 통신 현대 사업을 총괄토록 했다. 그는 그 뒤 체신부 장관으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전두환 회고록 2)

홍성원 전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의 말.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TDX, 반도체, 컴퓨터 개발 등이 그 당시 추진한 주요 사업입니다.”

1981년 8월 21일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신 부총리는 “경제정책 기반 정착을 정책 최우선으로 삼아 물가안정과 개방, 자율화를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면서 “산업구조를 비교우위 중심으로 개편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확정한 5개년계획에 TDX, 반도체, 컴퓨터 등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적극 육성키로 했다.

오명 국가원로자문회의 상임의장(당시 체신부 차관)의 회고. “TDX 개발이야말로 내가 체신부로 온 이유였다. 나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것을 성공시켜야 했다. 나는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최순달 소장을 불렀다.”(30년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오명 차관과 최순달 소장 두 사람의 이날 대화 내용.

△오 차관=TDX를 국산화합시다.

△최 소장=(깜작 놀라며)차관님 적어도 100억원 이상 개발비가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지금 10억원짜리 연구 프로젝트도 없는데 100억원이 가능하겠습니까.

△오 차관=그럼 100억원을 드리지요. 할 수 있겠습니까.

△최 소장=시간을 좀 주십시오.

일주일 후 최 소장은 부소장인 경상현 박사와 함께 차관실로 왔다.

최 소장은 “200억원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 차관의 대답은 명료했다.

“충분히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이 일을 성공하면 앞으로 수백억원 규모의 대형 연구개발(R&D) 프로젝트가 얼마든지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면 과학기술인 앞에서 죄인이 될 것입니다.”

최 소장은 이 무렵 오 차관에게 한국전자통신기술 기술담당 상무로 있던 양승택 박사를 연구소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오 차관은 군말없이 “그렇게 하지요”라고 말했다. 양 박사는 그해 10월 연구소로 출근해서 최 소장으로부터 시분할교환기개발사업단장 임명장을 받았다. 당시 개발단장은 경상현 부소장이 겸직했다. 경 부소장은 이듬해인 1982년 1월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체신부는 1981년 10월 20일 '국산 TDX 개발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TDX 불모지인 한국이 처음 만든 야심에 찬 국산화 계획이었다.

체신부는 기본방향으로 TDX를 개발해 종합정보통신망 구축을 위한 자주 기술을 확립하고 정보사회에 대비하며 통신, 컴퓨터, 반도체 등 과학기술 선진화로 전자산업 고도화를 이룩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TDX 개발 사업은 국가전략사업으로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추진하며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구심점으로 생산업체와 공동 개발, 1단계로 농어촌과 중소도시형 소형 교환기를 개발하면서 기술을 축적하고 2단계로 대용량 교환기를 개발해 종합정보통신망 실현을 위한 표준기종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이 같은 정부와 연구기관, 산업체가 공동 R&D 체제를 구축한 일은 TDX가 처음이었다. 제품 생산은 삼성반도체,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이 맡기로 했다. 철저한 협업체제였다.

전자통신연구소 기획안의 TDX 개발비는 240억원이었다. 이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였다.

최광수 당시 체신부 장관은 내심 불안했다. 오 차관을 믿지만 기술 개발에 실패할 경우 책임 문제 등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 장관=만약 개발한 교환기가 경제성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오 차관=연구를 계속하면서 수입 제품을 사용하면 됩니다. 우리가 교환기를 개발하면 원가 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어 수입 단가를 깎을 수 있습니다. 5000억원어치 교환기를 구입하면 10%만 삭감해도 500억원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오명 국가원로자문회의 상임의장의 회고록 증언. “기획안 개발비는 240억원이었다. 나는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결재했다. 10억원 프로젝트도 없던 당시로서는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240억원의 개발비는 선진국들이 전자교환기를 개발할 때 들이는 비용의 10분의 1도 안되는 돈이었다.”

1982년 3월 15일 최광수 체신부 장관 주재로 체신부 회의실에서 TDX 개발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우재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과 최순달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을 비롯한 해당 기관 책임자들이 참석해서 TDX 개발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앞으로 방향을 논의했다.

최 장관은 회의에서 “TDX 국산화는 모두 일치단결해서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면서 “각자 맡은 일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최 장관은 회의가 끝난 뒤 최순달 소장에게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

“연구소는 개발 일정을 확정하고 최선을 다해 개발할 것이며, 만약 실패한다면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다는 서약서를 간부들이 서명 날인해서 제출하시오.”

이와 관련한 최순달 소장의 회고록 대화 내용.

△최 장관=최 소장, 240억원을 들여 개발하는데 자신이 있습니까?

△최 소장=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 장관=개발에 실패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최 소장=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지요.

△최 장관=그렇다면 각서를 쓰시오.(40년 후 이 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립니다)

서약서 내용은 양승택 단장이 작성했다. 양승택 단장의 말. “서약서는 '저희 연구단 연구원 일동은 최첨단 기술인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로 작성했습니다.” 이 서약서는 훗날 'TDX혈서'로 불렸다.

최순달 소장의 회고. “나는 각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개발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5월 21일 전두환 대통령은 체신부 장관에 최순달 소장을 깜짝 임명했다. 교환기 개발 연구 책임자를 장관으로 발탁한 것에는 TDX를 꼭 개발하라는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사가 담겨 있었다. “우리 기술로 TDX를 꼭 국산화하자.” 연구원들의 TDX 개발 의지는 장작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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