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다. 정신없이 집으로 도망쳐 오느라 범행을 은폐하거나 증거를 숨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주 우연히 그날은 비가 왔다. 흉기로 쓰인 망치를 일하던 편의점에서 빌리는 장면도 우연히 지나가던 파리 한 마리에 가려졌다. 마치 온 세상이 지켜주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웹툰을 원작으로 드라마화, 넷플리스에서 방영된 '살인자ㅇ난감'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탕의 첫 살인 장면이다.
살해 대상이 흉악한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이탕은 그 이후로도 또 다른 살인을 반복하게 된다. 연이은 살인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처럼 증거가 남지 않는다. 그러던 이탕이 거의 유일하게 경찰에게 내준 흔적이 하나 있다. 바로 범행 직전 한입 깨물고 던져 버린 '단감'이다. 단감에 남아 있던 잇자국은 그동안 연쇄 살인을 벌여온 범인을 경찰이 특정하는 단초가 된다.
드라마에서는 그 이후의 전개가 또 다시 예기치 못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실제로 과학수사에서 치아 모양은 흔히 알려진 지문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사람마다 다른 치아의 모양은 지문보다도 더 일치 가능성이 낮다. 여기에 치과 진료 기록을 받은 내역까지 더해지면 대상자의 신원을 알아내고 다양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과학수사에서 치열·치흔 감정이 주로 활용되는 분야는 뒤늦게 발견된 시신에 대한 부검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 유골만 남았더라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치아를 이용해 연령대를 추정할 수 있고 보철물, 임플란트 등 생전 치과 기록과 대조도 가능하다. 치아 상태나 입안에 고인 혈흔 등은 사고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 시료로 여겨진다.
이같은 조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분야가 바로 법치의학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사건과 2014년 세월호 사건 등 대형 참사에서도 사고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국내에서 활동 중인 법치의학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산대, 가톨릭대 등 7명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치아가 맞물리면서 생기는 흔적인 '교흔'이 국내 과학수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건 1969년 '한강나룻터 여인살해사건'이다. 당시 국과수에서 교흔 감정으로 사건을 해결, 치과의사 법의학관이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는 방사선학, 유전자검사 등 첨단 의과학 기술이 법치의학 분야에 도입돼 보다 정확한 개인 식별이 가능해졌다.
살인자ㅇ난감 속 이탕은 거듭된 범행과 도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운 좋게 수사망에서 벗어나고 여러 도움을 주는 조력자를 만나지만 그 끝이 좋을 수는 없다. '죽어도 싼' 대상을 찾아내는 직감도, 온 세상이 그의 살인을 숨겨주는 듯한 행운도 결코 축복이 아니다. 우연히 한입 깨물고 버린 과일에 잇자국이 선명한 것처럼 행위에는 흔적과 결과가 남는다.
박정은 기자 je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