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제히 고대역폭메모리(HBM) 투자에 돌입했다. 반도체 시장 침체에도 HBM 수요가 커지면서 내년 말까지 생산능력을 지금보다 2배 늘리는 데 착수했다. HBM은 인공지능(AI)과 고성능컴퓨팅(HPC)용 반도체와 맞물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다. D램을 수직 적층해서 만들기 때문에 HBM 제조에는 반도체 패키징 기술이 핵심이다. 양사의 HBM 투자가 후공정인 패키징 쪽으로 집중되는 배경이다.
◇HBM 반격 나선 삼성전자
HBM은 2013년 시장이 열리기 시작한 후 1세대(HBM), 2세대(HBM2), 3세대(HBM2E), 4세대(HBM3)까지 진화를 거듭했다. 2~3세대까지는 삼성전자가 시장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 HBM3를 개발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고성능·고용량 HBM3를 앞세운 SK하이닉스가 빠르게 시장을 잠식했다. SK하이닉스는 2021년 10월 HBM3를 업계 첫 개발했고, 작년 6월에는 미국 엔비디아에 공급을 시작했다. AI 반도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HBM3 수요를 촉발시켰는데, SK하이닉스가 이를 선점한 것이다. 자체 추산, HBM3 시장은 지난해 SK하이닉스가 80% 정도를 점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HBM 시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자 삼성전자도 보다 공격적인 전략을 내세웠다. SK하이닉스에 내준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기술은 물론 생산능력 강화에 총력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특히 삼성은 HBM3와 HBM3E 등 차세대 제품 양산에 집중하기로 했다.
삼성전자가 계획한 HBM 설비 투자 규모는 내년 말까지 지금보다 2배 이상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골자로, 금액으로는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패키징 등 후공정이 투자의 핵심으로, 이 분야 조단위 투자는 이례적이다. SK하이닉스를 맹추격하려는 삼성전자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투자는 패키징을 담당하는 천안 공장 중심으로 이뤄진다.
삼성전자는 HBM 설비 공급망도 대폭 강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HBM 제조는 실리콘관통전극(TSV)으로 미세한 구멍을 뚫은 D램을 수직으로 쌓는 기술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D램을 서로 부착하는 '본딩' 장비가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기존 일본 토레이와 네덜란드 베시를 많이 써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독일 수스마이크로테크 등 추가 공급사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같은 시도는 HBM 설비 구축 속도를 높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장비 납품기간(리드타임) 등을 고려, 신속히 설비를 확보해 생산능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HBM 관련 설비 납기(리드타임)와 구축에는 9~12개월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기술 차별화도 시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분기 실적발표 설명회에서 “최첨단 NCF 소재를 새롭게 개발해 현재 양산 중인 HBM3에 적용하고 있다”며 “HBM4 16단에서 칩을 직접 접합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NCF는 수직 적층하는 반도체 칩 사이를 빈틈없이 채워 부착하기 위한 필름 소재로, SK하이닉스의 MR-MUF 공정 기술에 대응하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사이를 EMC라는 물질로 채워 붙이고 있다. MC-MUF 방식이 NCF보다 효율적이란 것이 업계 중론이지만, 삼성전자가 HBM3에 적용하는 NCF는 성능과 품질을 개선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성(守城)전 펼치는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는 HBM3부터 확보한 시장 주도권을 보다 견고히 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 HBM3E 등 차세대 제품을 선제적으로 시장에 내놓고 후발주자와의 격차를 벌리려는 시도다. 신제품 양산 능력을 키우기 위한 생산능력 확대도 추진 중이다.
SK하이닉스는 5세대인 HBM3E 샘플을 고객사에 공급하는 등 HBM 기술력을 지속 강조하고 있다. 또 HBM에 대한 수요가 늘고, 삼성전자도 본격 HBM 시장에 참전하면서 생산능력을 늘리는데 적극적이다. SK하이닉스 역시 내년에 HBM 생산 능력을 두배로 확대하기로 했다. HBM을 포함한 그래픽 D램 매출을 전체 D램 매출의 20% 비중까지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이미 HBM3을 양산 중인 SK하이닉스는 안정화된 설비와 공급망을 바탕으로 증설을 빠르게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주요 본딩 장비를 싱가포르 ASMPT와 우리나라 한미반도체로부터 공급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통한 HBM 양산성이 입증된 만큼 기존 공급망을 유지하되 장비 추가 발주 등 신규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HBM 설비 주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며 “올해 뿐만 아니라 내년에도 이같은 투자가 계속 될 것”이라고 밝혔다.
◇마이크론도 내년부터 HBM3E 도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가 본격화하면서 내년부터 양사의 시장 경쟁은 달아오를 전망이다. 규모의 경쟁에서 유리한 삼성전자가 HBM3 등 신제품 양산을 본격화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클라우드서비스제공업체(CSP)로부터 HBM3를 다수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 50%, 삼성전자 40%다. SK하이닉스가 조금 앞섰지만 올해는 양사 점유율이 46~49%로 비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3위 D램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도 HBM 시장에 가세한다. 마이크론은 개발 자체가 늦어져 현재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회사는 이에 HBM3를 건너 뛰고 HBM3E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HBM3E 내년 양산이 목표다.
그러나 올해와 내년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HBM 투자에 나서는 탓에 시장 점유율은 크게 높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렌드포스는 마이크론의 HBM 점유율이 작년 10%에서, 올해 4~6%, 내년 3~5%로 지속 하락세를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