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88〉과학영재 교육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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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영재 산실인 한국과학기술대학 제1회 입학식이 1986년 3월3일 대강당에서 열렸다.국가기록원 제공

1984년 12월 11일.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경제과학위원회 회의에 출석했다. 한국과학기술원법 가운데 개정법률안 제안 설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국과학기술원 학위과정에 학사과정을 신설해서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하고자 합니다. 고급 과학기술 시대에 과학기술 인재 양성은 국가의 시급한 과제입니다.”

개정법률안은 경과위와 법사위 심의를 거쳐 12월 17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이상희 국회경제과학위원장 대리가 이날 오후 2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심사 결과를 보고했다. “한국과학기술원에 학사과정을 신설해서 석·박사 학위 과정과 함께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면 고급 과학기술 인력 수요에 대응하고 선진 과학기술 입국 구현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경과위 심사안대로 의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국회는 개정법률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12월 22일 정부로 이송했다. 정부는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법률 3778호로 개정법률안을 공포, 이듬해부터 시행했다.

정부는 1985년 3월 9일 한국과학기술대학장에 최순달 전 체신부장관을 내정했다. 전임 윤옥영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은 그해 2월 23일 차관급 인사에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됐다. 최순달 신임 학장은 대구 출신으로,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대구공고 3년 선배였다. 최 학장은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버클리대에서 전기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휴렛팩커드 연구원과 캘리포니아공대 부설 NASA제트추진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박승찬 당시 금성사(현 LG전자) 사장의 권유로 귀국해 금성사 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일했다. 이어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초대 소장으로 있으면서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을 주도했다. 1982년 5월 21일 체신부 장관에 발탁됐고, 퇴임 후 한국전력공사 초대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과학기술처는 그해 5월 30일 한국과학기술대학 개교는 1986년 3월 예정이며, 제1회 신입생은 10월 6일부터 선발한다고 밝혔다. 한국과학기술대학 입학 자격은 일반고·과학고·공고 졸업자와 졸업예정자 가운데에서 수학과 과학 성적이 뛰어난 상위 10% 이내 학생으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안내했다. 학부는 자연과학부(120명), 전자전산학부(180명), 기계재료공학부(120명), 기술공학부(120명) 등 4개 학부에 모두 540명을 모집키로 했다. 특히 국내 최초로 능력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는 무학년 무학급제를 도입한다고 덧붙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1일 한국과학기술대학 조직과 학사운영에 관한 규정을 대통령령 제11705호로 공포했다. 이 규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대학 운영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가운데 학사운영은 한국과학기술원의 석사·전문석사·박사 과정 학사운영과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 △학장은 대학 교무를 총괄하고, 소속 교직원을 지휘 감독하며,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 학장은 한국과학기술원 이사회에서 선임하고, 과학기술처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입학 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자 및 이와 동등한 학력이 있다고 문교부 장관이 인정하는 학생과 과학고 재학생으로, 과학영재선발위원회가 인정한 학생이다.

과학기술처는 이 규정에 따라 과학인재선발위원회 규칙을 마련해 7월 27일 국무총리령 303호로 공포했다. 위원회는 위원장 1명과 위원 8명 이내로 구성키로 했다. 위원장은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이 맡기로 했다.

한국과학기술대학은 7월 신입생 모집 요강 안내서를 만들었다. 안내서에는 모집 인원, 모집 방법, 지원 자격, 전형 방법, 제출 서류, 입학생 특정 등의 내용을 소상하게 담았다. 최순달 학장은 과학영재 유치를 위해 교수들에게 당부했다. “자신의 모교와 연고지에 가서 과학영재가 우리 학교에 많이 지원하도록 해 주세요.”

곽윤근 당시 교무처장의 생전 회고. “강의가 없던 60명의 교수가 안내용 책자를 들고 전국 고등학교를 돌며 학교를 소개했다. 반갑게 맞아주는 곳보다 외판원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교수들은 이를 괘념치 않았다. 당시 국내 과학기술 분야는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남자 고교만 방문했다. 그 무렵 최순달 학장이 우수 교수 초빙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총장을 만났는데 총장이 “여학생 유치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최 학장이 “여학생은 모집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우수한 남학생을 유치하려면 우수한 여학생이 꼭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후 우리도 여학생 유치에 나섰고, 남학생 기숙사를 여학생이 사용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했다.”

그해 8월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이 최순달 학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최 학장, 서울대의 우수 인재들이 외국 유학을 나가면 귀국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하더군요. 이래서야 한국 인재들이 국내에 남아 있겠습니까. 한국과학기술대학 인재들은 외국에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한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외국의 노벨상 수상 과학자를 대학 부학장으로 초빙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최 학장의 회고록 증언.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학생도 없고 무명 신설 대학 부학장 자리에 노벨상 수상 과학자를 모셔 오라니, 실로 남감했다.”(최순달의 삶과 과학이야기)

최 학장은 노벨상 수상자를 찾아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미국 내 명문 이공계 대학을 두루 다녔다. 그 과정에서 24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32살 때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버클리대 도널드 글레이저 박사를 만났다. 최 학장은 세계 석학 글레이저 박사에게 말했다. “한국에는 젊고 유능한 과학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영재교육 기관이 있습니다. 당신이 와서 젊은 교수들과 학생들을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워낙 연구 활동으로 바쁜 사람이니 6개월에 한 번씩 오는 것도 좋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10월 1일 한국과학기술대학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4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에서 특별강연을 했다. 글레이저 박사는 강연에서 “노벨상 수상의 길에는 노력 이외에는 왕도가 없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과학기술대학은 10월 6일 실시한 필기시험 결과와 지능검사, 창의성 검사, 신체검사를 거쳐 11월 15일 최종 합격자를 발표했다. 합격생은 남학생 476명, 여학생 54명 등 530명이었다. 이 가운데 과학고 2년생은 39명이었다. 그러나 최종 등록생은 524명이었다. 전체 수석은 채희준 당시 서울 대성고 3년생이 차지했다. 대학 측은 최희준에게 그해 12월 3일 스웨덴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는 특전을 주었다. 그는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원을 거쳐 현재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해 12월 어느 날. 최 학장실로 교수들이 찾아왔다. 교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무슨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교가를 만든단 말이오.” “지금 교수들 가운데 학장님만큼 학교를 잘 아는 분이 없습니다. 꼭 교가를 만들어 주십시오.”

최 학장은 날마다 교가 작성을 놓고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로 가던 차 안에서 거짓말처럼 교가 가사와 작곡이 떠올랐다. 곡은 충남대 음악교수에게 부탁해 완성했다. 최 학장은 또 교훈을 '창의(創意), 문의(問疑), 의리(義理)'로 정했다.

1986년 3월 3일 오후 충남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과학기술대학 대강당에서 제1회 입학식이 열렸다. 과학영재 교육시대 개막이었다. 전학제 과학기술처 장관, 최순달 학장, 노벨상 수상자 글레이저 박사를 비롯해 학부모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전학제 장관은 치사를 통해 “과학기술은 국가 생존의 기반이므로 학생들은 기술개발과 활용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클레이 박사도 입학식에서 10분 동안 축사를 했다. 노벨상 수상자의 축사는 입학생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최 학장의 관심사는 온통 학생들뿐이었다. 어느 날 신문에서 나룻배가 뒤집혀 10m 떨어진 강 언덕에 닿지 못해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최 학장은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생들은 과학영재들인데 혹시 수영을 못해서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경제기획원을 찾아가 예산을 확보해서 교내에 수영장을 만들었다. 또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 학생들이 이동할 때 눈이나 비를 맞지 않도록 했다. 그는 미국 유학 경험을 되살려 학생들에게 사교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해 과학기술계는 미래 과학기술 동량인 과학영재 양성에 대한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