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척박한 땅인 '데스밸리'(Death Valley)가 있다. 19세기 중반 골드러시 시대에 개척자들이 금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은 소금 사막, 극소량의 강우량,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극한 환경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견디고 마침내 여길 벗어날 때 “굿바이 데스밸리!”를 외쳤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스타트업이 생명을 걸고 넘어야 하는 사선(死線)을 '데스밸리'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많은 스타트업이 참여하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개최지인 라스베이거스가 서부로 향하는 데스밸리 초입에 위치한다.
개척자들이 이곳에서 물과 음식을 챙기며 긴 여정을 준비했듯 CES는 스타트업이 생존을 넘어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디지털 러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숫자로 읽는 CES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된 올해 CES는 코로나19가 남긴 상처를 회복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었다. 지난해 대비 150% 증가한 3200개 기업이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아직도 이전 수준(2020년 4500개)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다.
세계 경기침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신냉전과 같은 글로벌 경쟁 구도 변화가 CES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참여기업 수를 살펴보면 미국 기업(1484개)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우리나라(469개)는 중국(502개)에 근소하게 뒤진 세계 3위 수준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우리 기업의 참여가 코로나 이전 수준(2020년 390개)을 훌쩍 넘어섰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은 2020년까지만 해도 1300개 기업이 참여하며 미국에 근접했으나 올해는 40%를 밑도는 수준에 그쳤다.
중국의 참여 저조 원인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 경제블록화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 또한 참여가 저조했다. 가장 많은 기업이 참여한 프랑스도 2020년(279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35개 기업에 불과했다.
유럽은 혁신기업이 줄고 있는 측면도 있지만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나 베를린국제가전박람회(IFA)와 같은 유럽연합(EU) 회원국 내 행사에 더 집중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번 CES에서 거둔 우리 기업의 성과는 눈부셨다. 'CES 혁신상'에 우리 기업의 제품 181개가 선정됐다. 이는 세계 수상 제품 가운데 약 3분의 1에 이르는 쾌거로, 코로나 대유행 직전인 2020년 101개에 비해 매우 큰 폭의 성장이다.
또한 단 23개 제품에만 주어진 '최고혁신상'에도 가장 많은 12개 제품이 선정됐다. 특히 우리 기업이 받은 혁신상 가운데 83%(111개 기업), 최고혁신상의 절반 이상(5개 기업)이 스타트업에서 나왔다. 이런 스타트업 가운데에는 정부 기술개발 자금 지원이 밑거름으로 작용한 기업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더욱 고무적이다.
◇트렌드로 읽는 CES
이번 CES 슬로건은 'IT에 빠져들어라'(BE IN IT)이다. 여기서 'IT'는 '그것'과 '정보통신기술'(ICT)의 중의적 의미로, 디지털 혁신기술이 일상의 모든 곳에 스며들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CES는 디지털 기술의 산업적 활용에 집중했지만 이번에는 디지털 혁신이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와 이슈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이는 대주제로 제시된 '모두를 위한 인간안보'와 소주제로 다뤄진 '지속 가능성' 등에서도 확인된다.
기술 트렌드 측면에서는 '모빌리티'와 '헬스케어'가 2020년부터 지속적으로 부각되며 핵심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모빌리티' 분야는 엔비디아, 퀄컴 등 칩 제조사까지 가세하며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급속한 가상화 확산에 따라 '메타버스·웹3.0' '게임·서비스'가 새롭게 제시된 점이 특징적이다. 다만 인공지능(AI)과 5G와 같은 기술이 예년과 달리 주요 트렌드로 강조되지 않은 점은 이례적이다. 디지털의 보편화라는 기술 성숙 속에서 이제는 AI와 5G가 모든 제품에 내재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조연설 내용을 통해서도 디지털의 전 산업 분야 확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빅테크 기업이 중심이었지만 올해는 비ICT 기업이 이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예가 글로벌 농기계 전문기업 '존디어'와 디지털 의료플랫폼 기업 '텔레닥'이다. 이들 기업은 농업과 의료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활용되는 혁신적 변화상을 제시했다.
미국 에너지부(DOE)와 사이버보안국(CISA)의 기조연설 참여도 눈에 띈다. 최근 미국이 자국 내 첨단 분야 생산기지 확충을 꾀하기 위해 추진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와 과학법' 등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 시장에 접근하려는 해외기업에 대해 에너지효율 기준, 사이버보안 기준 등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수 있다.
◇제품 전시로 읽는 CES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주요 기업들이 대규모 전시관을 운영했다. 우리나라는 독보적인 디스플레이(LG전자), 초연결 네트워크(삼성전자), 그린ICT(SK텔레콤), 초실감 메타버스(롯데정보통신) 등으로 관람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은 구글·아마존 등 디지털 강자뿐만 아니라 존디어(자율주행트랙터)와 같은 비ICT 기업의 대형 전시관이 눈에 띄었다. 중국의 경우 화웨이와 같은 대기업의 불참 속에 TCL, 하이센스 등이 전시관을 운영했다.
이전에 비해 전시 규모는 키웠지만 제품 기술력은 아쉬운 수준이었다. 일본 소니의 경우 전기차 등 영역파괴 시도에도 텅 빈 전시 공간은 옛 명성을 되찾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CES에서는 눈에 띄는 혁신적인 기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참여기업과 전시 규모 축소가 일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CES는 제품·기기와 같은 하드웨어(HW) 중심 전시회다.
이런 이유로 내재된 소프트웨어(SW)와 응용시스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같은 기술을 보여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핵심 원천기술은 드러나지 않을 뿐 여전히 혁신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만을 보고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AI, 5G와 같은 디지털 기술이 이제는 일상의 경험으로 확산하는 내재화 단계에 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으로 수용과 확산이 이뤄지고,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디지털전환을 넘어 디지털 전면화가 본격화되는 '진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CES 주 전시관 못지않게 유레카파크에 조성된 스타트업 전시관에 관심이 높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350여 개 우리 스타트업이 유레카파크 20% 이상을 점유하며 전시회를 주도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세계 시장을 향해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우리 스타트업의 자신감이 돋보였다. 국회와 정부, 대기업의 많은 관계자가 유레카관을 집중적으로 둘러본 것도 이 때문이다.
데스밸리를 넘어 우리 스타트업의 성공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이제는 정부가 화답해야 할 때다. 기술력으로 세계와 겨룰 수 있는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연구개발(R&D)·인프라와 디지털 인재 양성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혁신적 비즈니스를 실현할 규제혁신, 공정경쟁·투자환경과 같은 성장 생태계 조성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이번 CES는 대한민국 디지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축제의 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관이 함께 줄탁동시(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어미 닭과 서로 도와야 함)하며 새로운 투자와 글로벌 시장 진출로 내실을 다지고 외연을 더욱 넓혀야 한다. 디지털 대도약 시대를 맞아 “굿바이 데스밸리!”를 외칠 우리 기업·대한민국의 과감한 도전을 힘차게 응원한다.
전성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 esbjun@iitp.kr
〈필자〉 전성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1년 체신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30년 동안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서 두루 요직을 섭력했다. 미래창조과학부에서는 전파정책국장과 대변인, 과기정통부 출범 이후에는 통신정책국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한 정보통신기술 전문가다. 2021년 1월 IITP 원장으로 부임, 30년 동안 축적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ICT 연구개발(R&D)을 진두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