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공간 표현이자 병적인 사회에 대한 통찰
차원주의 등 당대 유럽의 예술운동 사조보다 혁신적인 문학적 시도
천재 시인 이상(1910~1937)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 작품 가운데 하나인 난해시 '진단 0 : 1'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논문이 나왔다.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이수정 기초교육학부 교수와 오상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머세드(UC 머세드) 물리학 박사과정생(GIST 물리전공 졸업생)은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이상의 시 '진단 0 : 1'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공간에 관한 시임을 규명하고 해설했다고 19일 밝혔다.
연구팀은 지난 2021년 이상의 대표적 난해시인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를 4차원(D) 기하·물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주목받은 바 있다.
'진단 0 : 1'은 가운데 점(·)이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11행 11열의 숫자표와 '진단 0 : 1'이라는 표현 등이 등장하는 짧은 시이다. 기존의 해석으로는 행이 바뀔 때마다 10분의 1씩 곱해지는 등 비수열이라거나 대각선을 사이에 둔 대립에 관한 묘사라는 관점 등이 있었다.
연구팀은 기존의 해석에서 벗어나 물리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숫자표 숫자를 시·공간 좌표로 보고, '진단 0 : 1'이란 마치 종이를 말아서 양 끝이 이어진 원통형으로 만들 듯 시·공간의 경계를 연결하고 반복시키는 진술이라고 봤다.
또한 '건축무한육면각체' 시·공간적 배경을 설정하는 시이며 여기에 나타난 시·공간의 연결과 반복이라는 주제는 반복, 무한, 공포, 권태, 자아분열 등 이상 문학에 등장하는 다른 모티프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이상의 다른 작품인 '삼차각설계도 선에관한각서6'을 토대로 숫자표에 등장하는 수열 '1234567890'이 무한히 반복되는 수열의 순환마디이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공간 좌표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연구팀은 이러한 발상을 '주기경계조건 모티프'로 명명했다. 주기경계조건 모티프를 토대로 진단 0 : 1의 숫자표를 이어 붙여보면 숫자표의 경계 부분에서 숫자 배열의 불연속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공간이 부적절한 주기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어붙인 숫자표의 상반부를 왼쪽과 아래쪽으로 한 칸씩 이동시켜 포개어 붙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이수정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진단 0 : 1에 대한 새롭고 혁신적인 해석을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주기성 시공간을 문학의 소재이자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상의 문학적 독창성과 전위성에 대한 이해를 끌어올렸다”며 “차원주의 등 당대 유럽의 예술운동 사조보다 혁신적인 문학적 시도”라고 말했다.
이어 “주기경계조건 모티프는 이상의 작품을 해석하는 새로운 프레임워크이자 패러다임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논문은 '이상 시의 주기경계조건' 논문 시리즈의 첫 번째 출판물로, 시리즈의 후속 논문에서는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오감도' 등에 드러난 주기경계조건 모티프와 그 해석에 관해 다룰 계획이다.
이번 연구는 GIST 개발과제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으며 논문은 이상문학회가 발행하는 '이상리뷰' 18호에 지난해 말 '이상 시의 주기경계조건 1 - 「건축무한육면각체 진단 0:1」의 파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광주=김한식기자 h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