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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5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이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분야와 사람에 따라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나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그를 '과학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박 대통령은 재임 중 '과학입국 기술자립'을 위해 담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 여정에 흔들림이나 중단은 없었다.

1966년 1월 16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하며,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는 과학 불모지인 한국에 과학기술의 씨앗을 뿌리고 기술 자립의 기반을 마련했다.(기술진흥 5개년 계획, 과학기술처 신설, 과학기술진흥법과 기술개발촉진법 제정, 과학기술 20년 장기계획 수립, 과학의 날 제정,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한국과학원 설립,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발족, 한국과학창의재단 설립, 서울연구개발단지와 대덕연구단지 조성, 한국통신기술연구소를 비롯한 분야별 전략연구소 설립, 전 국민 과학화운동, 1마을 1과학자 결연 등)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출발은 박정희 당시 의장의 질문 하나로 시작됐다. 1962년 1월 5일. “기술 분야에 문제는 없나요?” 당시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고했다. 1시간여 보고가 끝나자 박 의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새로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 기술 수준과 기술자만으로 그 일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대책이 있는지 이 점을 설명해 주기 바랍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경제기획원은 범정부 차원에서 처음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을 입안한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과장)의 증언. “당시는 과학기술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그 대신 기술자를 '쟁이'라고 불렀어요. 최고 권력자의 관심이 있기에 계획을 수립했고, 한국 과학기술의 주춧돌이 됐습니다.”

그해 11월 5일. 박정희 의장은 이날 열린 최고회의에서 파격의 제안을 했다. “경제와 과학기술 진흥 등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구인 경제과학심의회의 설치를 제안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 자문기구 등장의 첫 신호탄이었다.

1965년 5월 18일. 한국 과학기술사의 새 지평을 여는 찬란한 희망의 빛이 등장했다.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설립의 출발점이다. 박 대통령은 “이 사업은 내가 직접 추진해야겠다”면서 연구소 업무를 챙기며 설립을 독려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2월 2일 개인 자격으로 연구소 재단 설립자로 나서서 사비 100만원을 설립비로 기부했다. 박 대통령은 정부가 연구소 예산을 삭감하자 경제기획원에 '전액 살리라'고 지시했다. 이후 연구소가 신청한 예산은 정부가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제2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안을 의결했다.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5개년 계획 첫 장에 붙이는 말을 싣고 “우리는 과학기술을 가장 먼저 발전시켜야 하며, 5개년 계획을 국가계획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해 10월 6일 기공식을 치르고 공사를 시작했다. 최형섭 소장은 해외 과학자 유치에 나섰다. 당시 해외 과학자들의 고액 월급이 문제가 됐다. 국내 국립대 교수 월급의 3배에 이르렀고, 대통령보다 많았다. 교수들이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며 반발했다. 급기야 청와대로 진정서가 들어갔다. 연구소 연구원의 봉급표를 본 박 대통령이 말했다. “과연 나보다 월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군. 이 봉급 그대로 집행하시오.”

박 대통령은 해외 과학자들에게 주택 제공과 의료보험 혜택까지 지원했다. 과학자들 사기는 충천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3월 30일 연구소 육성법을 제정했다. 이 법안은 연구소 운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했다.

1967년 4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옛 원자력원 청사에서 과학기술처 개청식을 치렀다. 초대 장관에는 김기형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을 발탁했다. 1969년 10월 23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식이 진행됐다. 동양 최대의 최신 연구소였다. 연구소는 대통령의 지원 아래 연구실 독립채산제와 계약연구제 등을 도입했다. 연구소는 자동차, 조선, 제철 등 정부 미래산업전략 계획 작성에도 참여했다. 또 국내 처음으로 대형컴퓨터를 도입, 행정전산화를 시작했다. 정부는 1967년 1월 16일 국내 처음으로 과학기술진흥법을 제정했고, 그해 12월 과학기술후원회(현 한국과학창의재단)를 설립했다. 설립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전자산업 육성을 위해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를 초청했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로 불리는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의 삼고초려에 1977년 5월 귀국했다. 김 박사는 대통령 자문역부터 과학기술 강국과 전자산업 육성에 헌신했고, 전자신문(당시 전자시보)을 창간했다.

1970년 4월 8일. 정부는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을 확정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과학원 설립자로 나섰고, 유능한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과학원생에 대한 병역특례를 결정했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회고.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과학원생 병역특례는 불가능했습니다.” 한국과학원은 학생에게 학비 면제, 장학금 지급, 기숙사 제공에다 병역특례까지 주기로 했다. 이 같은 특전은 국내 대학이나 대학원에 없었다. 과학원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해 4월 14일. 정부는 서울 홍릉 일대에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을 거행했다. 과학기술처는 1972년 12월 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하고 민간기업의 기술 국산화를 지원했다. 이듬해에는 기술용역육성법을 제정, 외국업체가 장악한 기술용역시장에 국내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기술처는 1972년 4월 21일 과학의 날 기념식에서 '새마을기술 봉사단'을 창단했다. 과학기술처는 1973년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자통신, 철강, 기계, 조선, 화학 등 특정 분야의 기술 개발을 주도할 특정기관육성법을 제정하고 그해 12월 31일 공포했다.

1973년 5월 16일.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국내 과학기술진흥 정책에 관한 최고 정책조정기구인 종합과학기술심의회(현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 설치 규정을 공포했다. 과학기술을 국정 중심에 놓겠다는 의미였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 국민 과학화운동'을 제창했다. 새마을운동에 이어 박 대통령이 두 번째로 주창한 범국민운동이었다. 정부는 '1마을 1과학자 기술결연' 활동도 함께 전개했다.

1973년 5월 18일. 과학기술처는 이날 청와대에서 야심작으로 준비한 대덕연구학원도시(현 대덕연구개발특구) 건설계획 시안을 보고했다. 그해 12월 21일. “이 계획대로 도시 건설을 추진하시오.” 박 대통령은 대덕연구학원도시 기본계획을 최종 재가하면서 이같이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74년 4월부터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공사에 착수했다. 1976년 3월 10일. 대덕도시건설 현장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지시했다. “이 사업은 청와대가 중심이 돼 국가 재정 규모를 감안해서 투자 계획을 재조정하시오.” 이 지시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사업은 과학기술처의 손을 떠나 청와대 오원철 경제2 수석비서관이 주관했고, 건설계획은 전면 재조정됐다.

그해 10월 3일. 박 대통령은 '과학입국 기술자립'이라는 친필 휘호를 과학기술처에 내려보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2월 8일 과학기술처 순시에서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과학기술이 가장 발전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10월 25일 오후 1시 20분쯤 예고도 없이 대덕연구단지 관리사무소를 방문해서 현황을 보고받았다. 경호원도 없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만 대동한 방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서정만 당시 소장의 보고를 받고 “연구원들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한 뒤 바람같이 떠났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과학 일정이었다. 과학기술을 꽃피우기 위해 귀를 열고 발로 현장을 뛰어다닌 '과학 대통령' 박정희의 열정은 여기까지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