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는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지만 공급망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글로벌 분업화 시대 공급망은 과거가 됐고, 일본 수출규제와 같은 정치적 이슈와 미·중 분쟁과 같은 기술패권 다툼이 얽히면서 공급망 재편은 새롭게 대비해야 할 과제가 됐다. 전문가들은 “탄탄한 협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뿐 아니라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제조사 등 수요 기업의 공급망 강화 노력이 이어져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국산화-상용화-수익창출-연구개발(R&D) 재투자'라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려면 법·제도적 지원도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소·부·장 뭉쳐야 한다”
강사윤 한국마이크로전자 및 패키징학회장은 반도체 패키징 공급망 자급화 방안으로 국내 반도체, 소재, 장비 업계 컨소시엄 구성과 'K-반도체 패키지 개발센터'를 제시했다. 패키징은 그동안 노광 같은 전공정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미세화에 한계가 온 반도체 성능을 끌어올리는 대안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국가 주도 대형 R&D 지원으로 기술 격차를 조속히 따라잡아야 한다는 게 강 학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반도체 패키징 소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이유로 해외 업체의 초기 시장 선점을 들었다. 강 학회장은 “오랜 기간 글로벌 반도체 기업 파트너로서 축척한 기술 노하우와 양산 경험이 국내 소재 업체에 높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기업이 소재 다변화를 최소화하려는 보수적 움직임도 후발주자로서 격차를 따라잡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는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가 불지핀 소재 국산화 움직임이 단기 성과에만 치우쳐 동력이 약화됐다고 진단했다. 강 학회장은 “올해 엔저 상황은 해외 소재 비중을 증가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일본은 정부 지원 하에 소부장 업체가 '조인트(Joint)' 컨소시엄을 구성해 반도체 패키지 관련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기술 개발에 긴밀히 협력한다. 대형 소재 업체인 쇼와덴코는 패키지 센터 '오픈 랩'을 설립했다. 실제 팹과 동일한 환경에서 패키지 테스트와 평가를 진행한다. TSMC를 비롯한 반도체 고객사에 토털 패키지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한 전략이다.
반면에 국내 소재 업체는 신규 패키지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전무한 상황이다. 고객사 공정 소재 물성 분석·평가 장비를 위한 대형 인프라 투자도 쉽지 않다. 강 학회장은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차세대 패키지 시장에서 기술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새로운 기술에 대비 못하면 또 다시 뒤쳐진다는 얘기다.
강 학회장은 국내 반도체, 소재, 장비업체도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 반도체 업계가 지속적인 기술 우위를 가지기 위해선 밑바탕이 되는 소부장 기업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따른 조속한 대응 방안 마련이 국가 경쟁력 확보에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컨소시엄 구성과 함께 최소 2000억원 이상을 투자한 K-반도체 패키지 개발센터로 경쟁력 확보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수 독점적인 OLED 소재, 국내 생산 체제 갖춰야”
국내 디스플레이 무게 중심이 액정표시장치(LCD)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옮겨가고 있다. OLED 기술 고도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만큼 소재 중요성이 한층 부각된다. 남상욱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디스플레이 소재 공급망을 안정화하려면 국내 생산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국내 기업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거점을 둔 글로벌 기업도 포함된다.
OLED가 LCD와 견줘 자급화율이 낮다. 반도체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글로벌 OLED 소재 회사 자체가 소수 국가에 한정돼 있다. 미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따라 언제든지 수급에 제한을 받을 수 있는 배경이다. 보다 철저한 공급난 대비가 시급하다.
남 위원은 OLED 소재가 수요와 공급 모두 독점 체계라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는 대만, 중국, 일본 반도체 제조사 등 수요 기업 저변이 넓다. OLED는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일부 기업에 집중돼 있다. 남 위원은 “OLED 소재 업체도 극소수여서 공급마저 독점적”이라고 말했다. 특수 시장인만큼 공급망 전략도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남 위원은 대응전략으로 국내 생산 기지 확대를 제시했다. 합작법인을 세워 글로벌 기업의 한국 생산 거점을 유치하는 것도 방법이다. OLED 수요 기업이 우리 기업에 한정돼 있어 한일 무역 분쟁 당시 일본 기업도 피해를 봤다. 폴리이미드 등 수출 규제 품목을 다른 소재로 대체한 것이 대표 사례다. 수출 제한을 우회하기 위해 국내 공장을 증설하는 움직임도 잇따랐다.
미래 디스플레이 개발에 대비, 적극적 차세대 소재 R&D도 시급하다. 남 위원은 “폴더블, 스트레쳐블 등 폼팩터 변화 시 소재도 완전히 바뀌어야한다”면서 “새로운 폼팩터 등장으로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우리 소재 기업이 국산화율을 높일 여지가 많은 만큼 정부 등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배터리 소부장 자생력 확보 시급…'공동 R&D' 체계 만들어야
배터리 역시 무엇보다 '자생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배터리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의 자체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입 의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시준 동화일렉트로라이트 대표는 “배터리 소재 업체뿐 아니라 국내 배터리 셀 제조사, 정부가 함께 뭉쳐야 풀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국내 사업장은 우리 소재 기업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전해액을 공급받는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전해액은 무관세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국내 기업이 중국에 수출할 때는 관세 대상이다. 이른바 '할당 관세' 정책이다. 국내 배터리 제조사는 수익을 확대할 기회다. 반면에 소부장 기업 피해는 크다. 수입품 가격 경쟁력을 높여 국내 배터리 소재 업체 자생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해액·첨가제 분야 연구개발(R&D) 투자 축소를 야기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시장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다.
전해액 성능을 좌우하는 첨가제는 일본이 특허를 독점했다. 동화일렉트로라이트는 높은 진입 장벽을 넘고 독자 첨가제 개발에 성공했다. 그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기업 단독으로 일본 제품과 견줄 성능과 품질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공동 R&D' 생태계 구축을 제언한 이유다. 그는 첨가제 경우 전해액 생산기업, 첨가제 생산기업, 대학이 종합적 산·학·연 컨소시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종적으로 “배터리 제조사에서 최종 셀 내 신뢰성, 수명, 성능, 검증 과정이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웅기자 jw0316@etnews.com, 박소라기자 srpark@etnews.com, 송윤섭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