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출연연, '국제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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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코로나19 대전염병, 미-중 기술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파로 세계는 물가 상승, 금리 인상, 스태그플레이션 등 과거에 경험하기 어려운 초대형 태풍에 줄줄이 강타당하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각국은 디지털전환·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해 안보 상황 변화 등에 긴급하게 대처하고 있으며, 지난 30년 동안 지속돼 온 세계 경제의 질서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개방형 통상 국가로서 외부 충격에 민감하고 지정학적 위험이 매우 큰 우리나라는 현명한 국가전략을 마련하고 유연하게 위기를 극복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아야 할 시기다. 적절한 대응 수단을 통해 국가 역량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핵심기술 연구개발(R&D) 방식을 기술선도자(First Mover) 전략으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필수 과학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기술 자주권을 이뤄내 국가의 안보와 지속적 경제 발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디지털전환 추세를 올바로 파악하고 대한민국이 성공적으로 디지털로 탈바꿈하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풀어 나가는 주된 열쇠라 볼 수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국제 정세와 경제 질서 아래에서 앞으로 추진할 수 있는 발전적 연구 방향과 글로벌 연구 협력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코로나19 대전염병은 출연연과 과학기술계의 역할에 대해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과학기술이 한 나라의 국익과 경제 발전을 넘어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시대다. 코로나19를 통해 확인한 국내 과학기술 수준은 그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필자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대전염병 앞에서 참담함을 느꼈다. 우리가 세계 수준의 과학기술 강국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세계적인 전염병 때문에 국민이 큰 희생을 치른 뒤 지난 6월 말에야 비로소 우리는 백신 주권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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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출연연구기관 국제화 모델

국가 R&D 패러다임에도 과감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때다.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선진국 기술을 베껴 따라가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동안 R&D 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해서 세계 최고 수준(Top-Tier)의 연구그룹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일이 절실하다. 첨단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안고 있는 규모의 열세를 전략적 효율성으로 상쇄시키는 묘안이 필요하다.

필자는 대안의 하나로 '국가 지능화'를 강조해 왔다. 디지털전환의 핵심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지능정보 기술을 우리 사회 시스템에 내재화해서 국가 전체가 변화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지능화된 시스템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추진한 결과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전환으로 표현되는 최근 변화에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고, 좋은 연구 성과도 나오고 있다.

지금처럼 복잡하고 매우 어려운 국제 정세 문제를 풀기 위해 필자는 '국제화' '글로벌 협력'을 강조한다. 아직도 출연연에서 '국제화'는 상대적으로 큰 비중의 업무가 되지 못했다. 단기 이벤트성 행사나 국제 공동연구과제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국제화는 어렵고 복잡하며 장기간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과 성과 또한 도출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출연연 연구원이 전략적으로 국제화를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정부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국제화'를 규모 있게 지원하지 않은 문제도 있다. 국제 공동연구와 글로벌 연구 협력은 우리와 연구환경이 다른 해외 연구자와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공동 연구 주제에 대한 검증 및 평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동안 국제협력 사례를 보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경우 정부가 추진하는 소규모 국제 공동연구 사업에 매몰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선진국과의 기술 협력도 다각화가 필요하다. 절반 이상이 미국에 집중되고, 유럽은 35% 수준이다. 특히 영국·프랑스·독일과의 협력은 5% 안팎이다. 이와 함께 북유럽·동유럽 국가 등 분야별 기술 강소국과의 기술 협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개발도상국과의 기술 교류 협력은 산발적 일회성 행사 중심이고, 출연연에 수요가 많은 공적개발원조(ODA) 사업도 제한이 많다. 물론 ODA 사업이나 개도국 지원사업, 자원 부국인 중앙아시아 인력지원 사업 등이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 위상 제고와 발전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ETRI가 추진한 베트남 우정통신기술연구소(PTIT) 대상 ICT 인력양성사업의 경우 아쉬운 것이 많다. 10년 넘게 지속한 베트남,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국가 대상으로 한 전문 인력 110여명의 기술 전수 교육은 맥이 끊김으로써 그동안의 경험·가치·노하우·인맥 등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물론 출연연이나 대학교의 국제협력 사례 가운데 모범사례도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베트남에 'VKIST'를 세워서 운영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과학기술 교육 모형은 일본과기원, 홍콩과기대, 싱가포르 난양공대를 설립하는 참조 모형이 됐다.

국제협력 발전 모형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선 목표와 체계가 장기적이고 지속성을 띠어야 한다. 이제는 출연연이 K-컬처, K-푸드, K-팝을 뛰어넘는 K-과학기술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국제화의 길을 닦는 일이 시급하다. 올해는 ETRI가 '국제연구소'라고 선포한 원년이다. 기술패권 경쟁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출연연에서 국제협력 다각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직접 지난해 말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벨기에 등 주요 유럽연합(EU) 국가들과 의미 있는 R&D 협력을 이뤄 냈다. EU 회원국과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로나19 상황을 무릅쓰고 추진하고 있다. 이제는 EU 주요국을 벗어나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와의 협력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국제협력 다각화의 일환으로 EU와 또 다른 협력 네트워크를 마련하려는 것은 현재 세계적 상황에서 효과적 대안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제협력이 미국 일변도의 기술협력이었다면 미-중 기술패권 경쟁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유럽 주요국과의 R&D 협력은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럽과 대한민국 사이에 한 줄을 더 잇게 되면 미·중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우리의 위험도 쌍줄 타기로 반감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우즈베키스탄·필리핀 등 자원 부국과 큰 시장을 보유한 개도국을 대상으로 기술교류회, 초청연구, 기술 컨설팅을 꾸준히 제공하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모형이 널리 확산하고 여기서 나아가 기술사업화를 위한 시장 교두보 확보도 가능할 것이다.

과학기술은 이제 선진국 벤치마킹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기술 국산화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국제화가 중요한 시점이 됐다. 6G 이동통신 사례가 대표적이다. 먼저 새로운 기술 개념을 만들어서 우리의 창의적 생각을 기술 표준으로 제안하고 반영하는 게 첫 단추이고, 가장 중요한 연구 접근 방식이다. 여태껏 우리가 해보지 않은 방식이다.

출연연이 발 벗고 나서서 국제화 무대 주인공이 돼야 한다. 역할과 책임(R&R)에 맞게 R&D를 함에 다양한 사고와 실험을 통해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연구자의 길을 걷길 기원한다. 그동안 국제화·글로벌 협력의 기존 틀에서 과감히 탈피해 유럽의 주요 대상국과 연구 분야를 다변화해야 한다. 이로써 디지털 탈바꿈의 대전환 시대에 기술 자주권 확보와 국가 역량 강화, 국민의 행복에 보탬이 되고 기여해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실현코자 하는 성공적 국제화 모델이다.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joonkim@et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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