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51>과학기술처, 기술개발촉진법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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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월 14일 과학기술처 초도순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이 새해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2년 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은 영하의 날씨 속에 이날 오전 과학기술처를 초도 순시해서 과학기술처의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각하, 어서 오십시오.” 박 대통령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오전 9시 50분께 과학기술처 현관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박 대통령을 영접했다. 박 대통령은 최 장관의 안내로 이창석 차관 등 주요 간부들과 악수하고 곧장 대회의실로 올라갔다.

이날 업무보고는 대통령 입장과 국민의례, 업무보고, 대통령 말씀 순으로 진행했다. 박 대통령은 1시간여 과학기술처 업무계획을 보고받은 후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과학기술을 최우선 해야 한다”면서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인과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나라를 재건키로 결의한 후 기술자는 기술, 고급 두뇌를 지닌 과학자는 두뇌를 제공해서 부국 독일을 이룩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고급 인력을 양성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면서 “국공립 연구기관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운영방안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최 장관은 이보다 앞선 업무보고에서 “올해는 과학기술정책의 기본 목표를 과학기술진흥 기반과 풍토 조성, 산업기술 개발 촉진과 국제기술 교류 확충에 두고 이를 실천하겠다”고 보고했다. 최 장관은 “올해 이공계 대학과 대학원 교육 및 기초연구를 강화해서 고급 두뇌를 확보하고, 중화학 공업 중심의 기술집약적 고급 제품을 수출할 수 있도록 수출주도형 첨단 전략기술 개발에 집중하겠다”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술개발촉진법과 기술용역육성법 등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처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가 끝나자 곧바로 기술개발촉진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최 장관의 회고록 증언. “정부가 연구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일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기업이다. 기업이 필요한 기술을 자체 개발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해야 한다. 이에 따라 추진한 법안이 기술개발촉진법이다. 민간기업이 자율적으로 독자 기술개발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과학기술처는 18조 부칙의 법안을 마련해 국무회의를 거쳐 1972년 7월 국회에 제출했다. 과학기술처는 법안 제안 이유로 '산업의 국제경쟁력 향상과 독자 기술을 개발해 각 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이 법안을 국회 경제과학위원회 심의를 거쳐 그해 12월 1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해 통과시켰다. 국회는 이 법안을 12월 28일 정부로 이송했고, 정부는 이날 법률 제2399호로 법안을 공포했다.

기술개발촉진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기술개발을 위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기술개발준비금을 적립하며, 준비금 사용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정부는 수입업자가 독자 기술을 개발해 수입한 제품을 국산화했을 경우 산업 육성을 위해 조성한 준비금의 일부를 기술개발에 지원할 수 있다. △정부는 기술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각종 시책을 강구해야 하며, 이 법에 따라 기술개발을 하는 사람에게 조세감면규제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세금을 감면할 수 있다. △정부는 기업체가 기술개발이나 기타 기업경영 합리화를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기술정보 제공을 위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술개발에 대해 정부가 소유한 공업소유권을 무상으로 양여할 수 있다. △정부가 위탁하는 연구용역계약에 대해 필요한 경우 정부 귀속 연구기기나 설비 등을 무상으로 양여할 수 있다. △기술개발과 적정기술 도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과학기술처에 위원장 1명과 위원 14명 이내로 기술개발심의위원회를 설치한다. 위원회는 기술개발준비금 적립과 사용에 관한 사항, 수입업자의 기술개발에 관한 사항, 기타 과학기술처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을 심의한다.

기술개발촉진법은 한마디로 국내 기업의 기술 국산화를 돕기 위해 제정한 법이었다. 정부는 1977년 개정안에 '국산 신기술 제품 제조자를 위한 보호' 조항을 추가했다. 법은 국내 기업의 기술 도입을 놓고 한때 논쟁 대상이 되기도 했다. 대표 사례가 1978년 비디오테이프 생산용 중간재인 폴리에스테르 필름의 기술 도입 관련 갈등이다.

당시 국내에서 제일합섬(현 도레이첨단소재)과 선경화학에서 필름 만드는 기술을 외국에서 도입하고자 했다. 당시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과 미국 업체는 한국에 기술을 이전해 주지 않았다. 일본 도레이는 우리보다 앞서 제조 기술을 이전받아 필름을 생산했다.

제일합섬은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엄청난 기술료를 요구, 사업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최종현 선경(현 SK) 회장이 197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방문해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기술연구소는 기업의 기술해결사로 불렸다. 기업과 계약 기업이 필요한 기술을 연구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공대에서 고분자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귀국한 최남석 박사(전 럭키중앙연구소 소장)가 필름 기술을 자신이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최 박사는 선경의 대폭 지원을 받아 계약연구 1년 만에 필름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기술연구소와 선경화학은 1978년 1월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발표했다.

그러나 필름을 가공하려면 생산 설비가 필요했다. 선경화학은 자체 설비가 없었다. 선경화학은 일본 도시바에 제품 생산을 의뢰했다. 도시바 자회사 도레이는 한국이 폴리에스테르 필름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과 제품 질이 우수하다는 점을 알고 그동안 기술 이전을 거부한 제일합섬 측과 접촉했다. 도레이 측은 기술료 없이 기술을 이전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일합섬 측에 제안했다. 제일합섬은 즉시 경제기획원과 상공부 등에 필름 기술도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기술개발촉진법 제정으로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처 장관의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 했다. 기술 도입 여부를 결정짓는 열쇠는 최형섭 장관이 쥐고 있었다.

이와 관련한 최형섭 장관의 회고. “당시 회사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동생과 중학교를 함께 다녀서 나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가 내게 사정사정했다. 그는 '장관님, 이번 일이 잘못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한 번만 하락해 주시지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 얼굴을 봐서라도 해 주고 싶네만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네. 국내에서 어렵게 개발한 기술을 그냥 사장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그럴 수가 없네'라고 거절했다.”

국내 언론은 당시 외국 기술 도입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기술개발촉진법에 따라 국내 업체의 기술 국산화를 위해 외국 기술 도입을 막았지만 찬반 논쟁은 확산됐다. 경제기획원과 상공부, 과학기술처 등이 머리를 맞댔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때 청와대가 나섰다. 청와대 고위인사가 기술 도입에 관한 사항을 다루는 기술개발촉진위원회 위원장인 이창석 과학기술처 차관에게 어느 날 전화를 했다. 그는 이 차관에게 말했다. “소신대로 일을 진행하세요.” 기술 모방에서 자립 기술로 기술 정책이 전환하는 신호탄이었다. 경제기획원은 1978년 11월 9일 제일합섬의 기술도입 인가 신청서를 되돌려 보냈다.

최 장관의 증언. “제일합섬의 기술 도입은 이로 인해 무산됐다. 이 조치로 우리가 개발한 국산 기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종현 선경 회장은 최남석 박사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10억원을 연구개발기금으로 연구소에 기부했다. 최 박사가 폴리에스테르를 국산화함에 따라 선경화학은 막대한 금액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최 박사는 연구소에서 고분자부장을 거쳐 럭키중앙연구소장과 LG화학 부사장 겸 기술연구원장으로 재직했다.

선경화학은 1978년부터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체 연구실을 설립, 제품 개발을 계속했다. 그 결과 1981년 선경화학은 미국, 서독, 일본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컬러 비디오테이프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기술개발촉진법 울타리 덕분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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