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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1월 14일 과학기술처를 초도순시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9년 1월 어느 날. 미국 뉴욕공대에서 교수로 일하던 정근모 박사(전 과학기술처 장관)는 운명적인 뉴스와 만났다. 뉴욕타임스를 읽다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존 해너 미시간주립대 총장이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에 취임했다는 기사였다. 그해 1월 취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해너 총장을 개발처장에 임명한 것이다. USAID는 군사 분야를 제외한 대외 원조를 총괄하는 연방정부조직으로, 당시 대통령 직속기관이었다. 해너 총장은 정 박사와 각별한 사이였다. 정 박사에게 장학금을 준 스승이자 멘토였고, 정 박사 결혼식에도 참석해서 축하해 준 남다른 관계였다.

뉴욕타임스 기사 중 정 박사의 가슴을 뛰게 한 내용은 바로 해너 처장의 취임사였다. 해너 처장은 “개발도상국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이 발언은 대외원조 정책 방향을 '물자 지원'에서 '인재 양성'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미였다. 정 박사는 해너 처장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정근모 전 장관의 회고록 증언.

“기사를 읽는 순간 하버드대 행정대학원(현 케네디스쿨) 과학기술 정책과정에 다니면서 썼던 '후진국에서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라는 논문이 생각났다. 미국에 유학한 각국 과학기술 인재들이 귀국해서 조국 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고민한 논문이었다. 논문의 핵심은 '미국 원조기금으로 개발도상국에 과학기술연구와 교육 기관을 설립하면 두뇌 유출을 막고 과학기술 발전도 도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정 박사는 매사추세츠공대(MIT)에 근무하면서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이 신설한 '과학기술 정책과정'에 등록해 공부했다. 과학기술 행정 이론과 실제 정책을 배우고 토론하며 미래를 구상하는 최고경영자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서 쓴 논문 제목이 '후진국에서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었다. 정 박사는 연구팀 대표로 논문을 발표했다.

마침 논문 발표 자리에 아서 올리너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주임 교수가 참석했다. 뉴욕공대는 전기물리와 초단파 전자기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았다. 발표가 끝나자 울리너 교수가 정 박사에게 “뉴욕공대에서 강의를 한번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 박사는 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정 박사가 뉴욕공대에서 강의를 마치자 대학 측에서 부교수와 연구소장직을 제안했다. 연봉은 MIT의 2배고 평생 근무를 보장해 주는 영년교수(tenure)도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정 박사는 1967년 9월 뉴욕공대 전기물리학부 부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나이 27살 때였다.

정 박사는 과거에 쓴 논문을 들고 워싱턴에 있는 옛 스승 해너 USAID 처장을 만나러 갔다. 오랜만에 제자를 만난 해너 처장은 무척 반가워했다. 해너 처장은 정 박사의 논문을 보고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논문을 USAID 사업을 위한 계획서로 고쳐서 작성해 주게.” “알겠습니다.” 정 박사는 1969년 10월 기존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학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안건'이란 사업 제안서를 만들어서 USAID에 넘겼다. 분량은 영문 60쪽에 달했다.

해너 처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의 새로운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편지와 함께 정 박사가 작성한 제안서를 함께 보냈다. 해너 처장은 동시에 존 휴스턴 주한 USAID 단장에게 “김학렬 경제부총리를 만나 보라”고 지시했다. 휴스턴 단장은 이에 따라 김 부총리를 만나 영문 60쪽 분량의 '과학기술 특수대학원 설립 제안서'를 전달했다. 휴스턴 단장은 이날 “한국이 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 미국 측은 적극 지원하겠다”는 USAID 측 입장도 전했다.

당시 한국은 두뇌 유출이 심각했다. 두뇌 유출은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화를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 대학 교수와 협의해서 1968년 '이공계 대학원 교육 육성방안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의 회고록 증언. “유능한 국내 대학 출신이 국내에 머무르면서 국제 수준에 도달한 대학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면 유능한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고 국내 과학기술을 급속히 진흥시키는 지름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과학기술 후진성을 조속히 벗어날 길은 대학원 교육의 충실에 있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은 연구를 위주로 대학원 교육을 선행하고 이를 대학 학부 교육으로 확대해서 큰 성과를 내고 있었다. 연구소가 이런 조사연구를 한 이유는 연구기관과 대학원은 상부상조 관계고, 대학원에서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때 연구기관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불이 꺼지지 않은 연구소)

이 조사연구 책임자는 최규원 서울대 화학과 교수였다. 조사보고서는 미국과 호주, 캐나다 등 세계 각국의 대학원 교육 실태를 조사하고 검토해서 연구기관과 대학원 간 유대강화 방안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방안으로 연구소 연구원이 대학원에 출강하고, 대학교수가 연구소 연구 활동에 시간제로 참여하고, 대학원생은 연구소에서 연구지도를 받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우리 실정에 맞는 대학원 교육 목표와 대학원 교육 방법도 제안했다.

조사보고서는 이공계 대학원 교육 강화를 위해 학과별 학생정원제를 폐지하고, 대학에 소속한 대학원과 별도로 독립한 이공계 대학원을 신설하며,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하기 위해 교수 대우를 개선하고, 국제교류 확대와 대학원생에게 장학금 지급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이런 조사 결과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1969년 말 연구소 부설 이공계 대학원 설립(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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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만든 이공계 대학원 설립 조사보고서.>

그러나 제안은 기존 대학과 대학원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대학 교수의 강한 반발과 문교부 반대에 부닥쳤다. 그해 12월 열린 경제과학심의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했으나 부결됐다. 이공대 대학원 설립이 무산될 무렵 USAID 제안서가 새롭게 등장했다. 1970년 3월 5일 경제기획원에서 열린 경제동향보고회에서 김학렬 경제부총리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USAID 제안 내용을 보고했다.

과학기술 진흥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과학기술처 책임 아래 과학기술 대학원 설립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다음날인 6일 경제기획원과 문교부, 과학기술처 차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설립 계획에 착수했다. 경제기획원은 같은 해 3월 18일 장예준 차관이 기자들에게 “인력자원 양성책의 하나로 기술계 대학원을 설립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해 3월 하순 과학기술처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한국 과학기술 대학원(가칭) 설립 구상'이란 대외비 문건을 작성했다. 과학기술처는 이 문건에서 △이공계 대학원 현황과 문제 △특수 이공계 대학원 설치의 필요성 △한국 과학기술 대학원 설립 추진 계획 △한국 과학기술 대학원(가칭) 법안 골자 △자료편 등을 담았다. 설립 구상 중에는 대학원 설립 목적과 설립 형태, 운영상 특징, 학생과 교수, 학과, 대지와 시설, 소요 자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과학기술처는 문건에서 △우수한 과학기술인 수요 증대와 신기술 개발 확대를 위해 대학원 설립은 시급하고 △현재 대학원 체제와 제도 아래에서는 과학기술자 양성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우수한 두뇌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별도의 특수 이공계 대학원 설립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설립할 대학원은 특수 법인 형태로 정부 출연금과 국유 재산을 양여하고, 연구 중심 집중 교육을 실시하며, 대학원생 전원에게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과학기술처는 대학원 설립은 한국과 미국이 공동 사업으로 추진하고, 국내외 관계 전문가들로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문건은 연구중심 이공계 특수대학원인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의 출발점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