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인간이 반드시 타인을 지배하는 성질을 띤다거나 권모술수를 제멋대로 사용한다거나 인간이라면 무조건 권력을 추구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네트워크 탄생'을 의미한다. 사회성이 발달한 인간은 타인과 꾸준한 관계를 맺고서 소통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 자체가 '네트워크 형성'이었다. 소규모 군집 생활에서 도시로, 다시 메가시티로 문명 범위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의사소통 수단 역시 편지와 파발, 봉화 시대를 거쳐 이메일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바뀌었다.
디지털 혁명 시대로 접어든 21세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 통찰은 유효할까. 단언컨대 그렇다. 디지털 혁명의 근간인 인터넷 자체가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네트워크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게 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과거엔 공상에 불과했던 인공지능(AI)의 등장과 딥러닝, 물리적 공간 제약을 넘어 의료시스템에 접근하게 해 준 비대면 진료, 또 한 번의 교통·물류 혁명을 이끌 드론 배송과 자율주행 배경엔 모두 디지털이 있다. 디지털을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한 무기로 취득한 인간은 언어와 국적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소통의 기반을 마련했다. 문명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오죽하면 스마트기기를 신체의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쓰는 인류에게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는 별칭까지 붙었겠는가.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 또한 짙은 법이다.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 즉 디지털 격차 시대를 열었다. 계층과 세대, 장애 유무에 따라 디지털 기기와 시스템에 접근하는 능력과 정도가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할수록, 고령층일수록, 장애가 있는 사람일수록 나날이 발전하는 디지털 시대가 두렵기만 하다. 게다가 지금은 비대면 방식이 뉴노멀인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아닌가. 200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정보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디지털 불평등, 디지털 격차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주변을 돌아보자. 어느덧 식당과 카페에서 대세가 된 키오스크 주문이 두렵다. 조금만 버벅거려도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신체나 정신 장애가 있다면 주문하는 일은 2~3배 더 어렵다. 이뿐인가. 서울역 매표소와 은행 창구 대기 인원의 대다수가 고령층이다. 마스크 파동 당시 재고를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지 못해 공적 마스크를 세탁해서 착용해야 했다는 사연도 있었다.
인간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정치적 동물이라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하는 방법 역시 정치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모든 국민의 행복할 권리와 존엄을 보장하고, 차별과 소외 없는 디지털 문명을 이룩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답은 한 가지, '입법'이다. 즉 좋은 법을 통해 좋은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를 디지털 포용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법안은 이미 준비돼 있다. 바로 '디지털 포용법'(이하 포용법)이다.
디지털 포용 사회는 차별 없는 디지털 서비스와 정보 접근을 통해 국민 개개인 삶의 질을 향상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기존에도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에 처음 제정된 '정보격차해소법'이 있었다. 그러나 해당 법률이 '지능정보화 기본법'에 흡수됨에 따라 범정부 차원의 디지털 포용 정책을 추진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정보격차 해소·예방 정책의 체계적 추진을 위한 법정계획은 물론 관계기관 간 역할 조정·협업 등을 위한 기구조차 부재한다. 또 단순한 디지털 기기 보급과 하향식 교육을 특징으로 하는 정책으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디지털 역량을 끌어올리기에 역부족이다.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담대한 도전을 모색할 시기다. 디지털 정책 방향을 대전환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포용법은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정책이나 법안과도 다르다. 디지털 포용 사회 진입을 위한 국가 책무와 역할을 세세히 규정하고, 국무총리 소속 '디지털 포용위원회'를 설치해 세부 시행계획이 힘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했다. 또 우리 사회 전반의 디지털 역량을 구체·세부적으로 측정하고, 디지털에 최적화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장애인과 고령자의 원활한 디지털 접근 대책까지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디지털 포용 정책 방향을 취약계층 중심의 사후적 지원에서 적극·선제 지원과 인재 양성으로 바꿈으로써 모든 국민이 차별과 소외 없이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구체화했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법안 주무 부처가 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과 함께 포용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이들의 바람은 하나같았다. 기술 속도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도에 기술과 사회 방향을 맞추자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상처를 보듬는 동시에 미래를 향한 도약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제 결단해야 한다. 디지털 포용 사회를 만드는 일에는 여야가 있을 수 없다. 국회는 조속한 입법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다가갈 수 있고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진정한 디지털 포용 사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국회의원) kangbw89@gmail.com
<필자 소개>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대표적인 차세대 정치인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거쳐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수행비서를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참여정부 인수위를 거쳐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했다. 20대 국회의원 총선 서울 은평구(을) 지역에서 처음 당선됐다. 당시 당내 경선에서는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본선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최측근인 5선의 이재오 의원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운영위원·기획재정위원·보건복지위원을 지냈다. 문재인 대통령 직속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 민주당 정책위원회 선임부의장을 거쳐 민주당 미래전환 K-뉴딜위원회 상임부위원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