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2020년대는 스마트폰 대신 증강현실(AR)글라스가 보편화된 스마트 기기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폰 등장부터 10년간 스마트폰에 익숙해졌듯 이제는 AR글라스가 대체하며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거란 분석이다. 지난해 5세대(5G) 이동통신 상용화에 이어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비대면 일상이 보편화되면서 확장현실(XR)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김광회 넥스트데일리 기자 elian118@nextdaily.co.kr
◇뉴노멀 언택트, XR로 진화 시도
XR는 증강현실(AR)·가상현실(VR)·혼합현실(MR)을 포괄하는 초실감형 기술을 일컫는다. AR와 MR는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형태인데, AR는 현실에서 가상 정보를 부가하고 MR는 반대 개념이다. 모두 기존 스마트폰 앱에서 접한 게임, 스트리밍, SNS, 전자상거래 등의 2차원적 가상 경험을 3차원으로 구현하는 기술로도 풀이할 수 있다. 등장한 시기도 오래됐고 주목받았던 기술이지만 제대로 조명받기 시작한 건 불과 석 달 전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3월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한 이후 세계는 바이러스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급작스런 비대면 일상에 적응해야만 했다. 이때 다양한 비대면 솔루션이 활용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도움이 된 건 맞지만 만족스럽다고 볼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기존 코로나19 이전 일상을 보조하는 수준을 기준으로 고안된 기술이었던 만큼 이전 일상을 완전히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세밀하고 복잡한 정보를 전달하려면 영상통화로는 충분치 않다. 한 곳에 모여 진행했던 공동 프로젝트 수행이나 실습 위주 교육은 물론 원격의료나 기기 점검·수리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또 법적 효력 발생이나 정보보안 또는 특별한 의미 부여나 만족을 얻기 위해 꼭 직접 만나서 전해야 할 것도 많다. 아무리 디지털화가 됐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양식은 여전히 대부분 현실에서의 행동을 바탕에 두고 있는 까닭이다. 단순한 연결을 넘어 한 공간에서 실제로 함께하고 있다고 믿겨질 정도의 가상. XR가 주목받는 이유다.
5G와 XR 연계에 큰 관심을 보이던 국내 통신업계도 지금은 달라진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지난해는 XR를 5G 강점을 반영하는 새로운 경험으로 강조했다면 올해부터는 이를 비대면에 최적화된 실용적인 수단으로 부각해 강조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비대면 서비스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통사들이 지난 한 해 XR 콘텐츠 확보를 위해 과감히 진행했던 투자는 현 상황에 걸맞은 활용사례를 빠르게 제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통신업계 바람처럼 XR는 초저지연 5G와 만나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서비스 유형으로 나아갈 전망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5G 인프라 확충과는 별도로 XR를 구현할 수 있는 웨어러블 단말까지 시장에 널리 보급시켜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제조사를 통한 단말에서의 기술 혁신도 수반돼야 한다.
◇XR의 시작, AR글라스
XR 중에서 일반에게 가장 빠른 대중화가 예상되는 기술은 AR이다. 현실에서 가상을 구현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평소 일상에서 더 실용적인 방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또 VR에 비해 구현에 필요한 성능이나 비용 부담도 덜하다. 최근 미세공정이 5나노(㎚)까지 정교해지면서 AR글라스도 점차 가볍고 작아지는 추세다. 대표적인 AR글라스 제조사로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매직리프, 오큘러스 등이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출시만 안했을 뿐 이미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XR 기업 인수로 기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애플도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AR 글라스를 선보일 것으로 예상되며, 오큘러스를 보유한 페이스북도 이탈리아 안경업체 룩소티카와 새로운 AR 선글라스 '오리온'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들은 모두 정보기술(IT) 기업이면서 XR에서 미래를 찾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AR글라스 교체기를 가늠하며 기민하게 대처하는 모습이다. 교체기가 언제가 될 지 예상하기 어렵지만 지난해만 하더라도 업계는 스마트폰-AR글라스 교체기로 오는 2024년을 예상했다. 이 시기는 5G 전환이 대부분 완료되고 2나노 미세공정 설비가 준비되는 시점으로, 수요·공급이 안정돼 AR글라스에서도 가격을 포함한 큰 변화가 있을 거란 전망에서다.
현재 AR글라스 보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가격이다. MS '홀로렌즈2'만 보더라도 최신 프리미엄 스마트폰 가격에 최소 다섯 배에 달한다. 일반 소비자들이 접하기엔 여전히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앞서 언급된 기업에서 출시한 AR글라스 중 대부분은 현재 기업용으로만 판매되고 있다. B2C 시장 진입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새로운 형태의 AR글라스가 속속 등장하며 이런 흐름과 전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XR 뷰어, 단말 교체 주기 앞당기나
USB 케이블로 스마트폰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유선 기반 AR글라스는 상당히 현실적이다. 이 제품은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없고 AR 구현에 필요한 대부분의 성능을 함께 유선 연결된 스마트폰에 의지한다. 유선 방식으로 인해 약간 불편할 수는 있지만 기존 기업용 AR글라스보다 훨씬 가볍고 가격까지 저렴하다는 강점이 있다.
이들의 등장에는 퀄컴도 큰 역할을 했다. 퀄컴은 MWC19에서 주요 OEM 및 이통사, 플랫폼 개발사들과 제조·공급·판매·콘텐츠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비전을 처음 소개한 바 있다. 이를 통해 5G 스마트폰과 연결되는 'XR 뷰어'를 빠르게 보급하겠다는 시도였다. XR 뷰어는 현재 퀄컴 스냅드래곤 855·865가 탑재된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경량 헤드셋 AR글라스로, USB-C 케이블을 사용해 단말과 연결해 사용하는 유선기기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XR의 사전적 의미를 본다면, 향후에는 VR·MR까지 포괄하려는 듯하다. 이를 두고 퀄컴은 저지연 5G에서 온디바이스 프로세싱과 에지클라우드 컴퓨팅을 결합한 '제한 없는 XR'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XR 뷰어 생태계 안에는 세계 이동통신사까지 포함된다. 5G 전환기를 맞아 이통사가 XR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흐름을 퀄컴이 읽은 것이다. 국내만 하더라도 SK텔레콤은 '오큘러스 고', KT는 '피코', LG유플러스는 '엔리얼'과 파트너십을 맺는 등 퀄컴과 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 중 LG유플러스는 보유한 XR 콘텐츠들을 무기로 지난 4일 '엔리얼 라이트'를 올해 3분기에 출시한다고 발표해 국내 AR글라스 보급은 더 빨라질 전망이다.
AR글라스 개발은 XR 뷰어를 통해 훨씬 넓은 산업 범위로 확대됐다. 전보다 다양하고 합리적인 가격의 유선 AR글라스가 시장에 등장했고 소비자 선택폭도 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기업이 아닌 개인도 부담 없이 XR를 마주하며 점차 익숙해질 시간을 제공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 소비자 경험이 반복되면 마크 저커버그가 말한 스마트폰-AR글라스 교체기도 더욱 앞당겨질 전망이다.
지난달 27일 공개한 퀄컴 XR 뷰어 생태계에서 스마트폰 OEM에는 국내 기업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해 페이스북, 애플, MS, 구글도 뷰어 OEM에서 빠졌다.
이에 대해 퀄컴 관계자는 “한국 스마트폰 제조사는 물론 다른 제조사 혹은 제조사가 아닌 기업들도 충분히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한국 기업 합류 가능성을 내비쳤다. 다만 이들 기업은 독자 AR글라스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으며 실제 그럴만한 역량도 충분하다. 더 큰 야망을 위해 협력보다 경쟁을 택할 여지도 있다. AR글라스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관련 시장이 개화함에 따라 치열한 경쟁도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