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이 9월22일로 창간 37주년을 맞았다. 잔칫상을 받아야 할 생일이지만 올해는 마음이 무겁다. 주변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곳곳이 지뢰밭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옛말 그대로다. '조국 사태'로 정치는 일촉즉발 상황이고, 진영 논리에 따라 여론은 사분오열돼 있다. 경제와 민생은 이미 임계점을 지났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울린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반도체 소재를 앞세워 우리 핵심 산업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 일본발 경제 보복이 배경이지만 덕분에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열기는 뜨겁다. 정부는 핵심 기술 국산화를 위해 사상초유의 투자에 나섰다. 산업계도 적극 거들고 있다. 기술 자립 원년까지는 아니지만 자체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공감대만은 어느 때보다 충만하다. 전자신문이 올해 창간 기념 슬로건으로 '기술독립선언'을 선정한 배경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독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슴 뭉클해진다. 아마도 일제 강점을 경험한 아픈 과거 때문일 것이다. 지난달 김성수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소재부품 대책 브리핑 자리에서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보인 것도 이런 감정의 발로였다. 그렇다고 의지만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현실은 다른 세상이다. '열심히 잘하겠다'는 열정만으로 부족하다. 모처럼 불붙기 시작한 '기술독립운동'이 한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허들이 있다. 최소한 세 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먼저 '지속성'이다. 원천 기술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지극히 상식 같은 이야기다. 뒤돌아보면 우리는 철 지난 레코드판처럼 기술 자립을 부르짖었다. 1970~1980년대에 기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국산화 운동이 시작이었다. 2000년대도 다르지 않다. 일본과의 대외 무역 적자가 심해지자 김대중 정부는 부품·소재 경쟁력을 위해 특별대책을 수립했다. 당시 2025년까지 첨단 신소재 100대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청사진까지 밝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천 기술은 일본, 독일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지금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소재·부품·장비는 오랫동안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시간만큼 인내가 중요하다.
두 번째는 '경제성'이다. 모든 소재, 부품, 장비를 국산화할 수는 없다.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인 우리 입장에서는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시장을 특정 회사가 독점하거나 수급이 까다로운 품목을 우선 개발해야 한다. 비록 많은 투자가 필요해도 훨씬 경제적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글로벌 공급망 체계에서 핵심 분야를 공략해야 한다. 밸류 체인에서 시장 가치가 없거나 쉽게 수급이 가능하다면 역시 기술 자립의 의미가 없다. 일본 이전에 세계 시장을 먼저 보고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 '온리 원(Only one)' 수준의 전략 기술에 집중하는 게 진짜 기술 자립이다.
마지막으로 '공진(供進)성'이다. 정부와 기업이 한길을 가야 한다. 정부는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도 함께 보조를 맞춰야 한다. 중소기업이 힘들게 국산화해도 이를 사 줄 대기업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아무리 핵심 기술을 국산화했다 하더라도 국내에서도 외면하는 제품이 해외에서 통할 리 만무하다. 품목 선정에서 개발 과정, 시장 개척까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정부도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정부의 발 빠른 관심과 투자,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기업이 주도하지 않는 기술 자립은 오래갈 수 없다. 정부의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기술독립군'은 기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취재 총괄 부국장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