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R&D 기획, 마이크로 트렌드에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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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에 나선 등산객은 길을 못 찾고 헤매기 쉽다. 앞에 간 사람의 발자국이라도 찾으면 안심이 되지만 그게 제대로 된 길인지 아닌지는 가 봐야 안다. 지금 우리 경제와 정부의 산업기술 연구개발(R&D)도 초행길을 걷고 있다. 그동안 선진국을 따라가던 전략에서 벗어나 '퍼스트무버'로서 길을 찾고 있다.

퍼스트무버의 어려움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시작된다. 정부 R&D 사업화 실패 요인으로 꼽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시장 환경 변화다. 어떤 사람은 10년, 20년 뒤 경제·사회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기술을 기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거 예측 사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94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과학기술 프런티어 100'을 발간했다. 20년도 더 된 책이지만 놀랍게도 내용 대부분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들이다. 가상현실(VR)과 로봇은 물론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20년 전에 예측한 방향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은 2016년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직후에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으로 규정되는 20세기 말에 이미 4차 산업혁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에 만화 '심술통'으로 유명한 이정문 화백이 1965년에 발표한 '서기 2000년대 생활 이모저모'가 화제로 된 적이 있다. 이 화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휴대폰, 자율주행차, 로봇청소기 등 지금 활성화되고 있거나 준비되고 있는 신기술이 거의 정확하게 묘사돼 있다. 이처럼 흔히 과학 예측과 상상 간 차이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경우도 많다.

이 사례를 볼 때 과거부터 기술 트렌드의 큰 틀은 의외로 예측이 잘돼 왔다. 그럼에도 R&D 사업화 과정에서 잘못된 시장 예측으로 어려움이 발생하는 이유는 '촉각' 부재 때문이다. 과거 미국 클린턴 정부 탄생에 크게 기여한 컨설턴트이자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전략책임자(CSO)를 지낸 마크 펜은 우리 미래를 만드는 것은 작은 집단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라고 주장했다. 사회 전반에 걸쳐 흐르는 거대한 기류가 아닌 '마이크로 트렌드'를 통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가 출판한 '마이크로 트렌드 X'에서는 사회·경제·기술 전반에 걸친 작은 변화가 제시돼 있다.

우리나라도 사업화 성공으로 연결되는 R&D 기획을 위해 수많은 기술 로드맵과 중장기 계획을 수립했다. 지난해 발표된 '산업기술 연구개발사업화(R&BD) 전략'도 100여개의 국내외 미래 예측 보고서를 메타 분석한 메가트렌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마이크로 트렌드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기술은 우수했지만 시장 환경이 악화돼 실패했다'는 이유가 반복될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 해도 이를 활용하는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시장에 안정 진입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작은 변화와 기술 접점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는 R&D 기획 단계에서 메가트렌드를 바탕으로 마이크로 트렌드를 분석할 때다. 미세한 시장 변화를 알아차리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변화에 즉각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 불확실성으로 인한 실패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산업 기술 R&D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화 성과가 도출돼 우리나라도 R&D 퍼스트 무버로서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yhchung@kei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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