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대통령까지 나선 '비메모리 육성' 성공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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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올 1월 청와대에서 기업인과 대화를 마친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과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사진: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취약한 비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높여 '메모리 반도체 편중' 현상을 완화하는 방안을 신속히 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치, 사회는 물론 다양한 현안을 논의하는 국무회의 자리에서 특정 산업을 구체적으로 지목해 육성을 지시한 것은 이례적이다. 문 대통령이 비메모리 반도체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올해 초 '2019 기업인과의 대화' 자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반도체 비메모리 쪽으로 진출은 어떤가”라고 물었고 이 부회장은 “기업이 성장하려면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면서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뜻을 밝혔다. 대통령이 직접 나설 정도로 비메모리 산업 육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부상했다. 특히 시스템반도체를 중심으로 비메모리 육성이 수차례 시도됐지만 산업 현실을 나아지지 않았다는 반성과 성찰도 작용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와 비메모리 양 날개로 날기 위한 과제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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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조 VS 340조'

메모리 반도체는 정보 저장 기능을 수행하는 반도체를 뜻한다. 비메모리는 말 그대로 메모리가 아닌 반도체를 말한다. 연산이나 논리 작업과 같은 정보 처리를 목적으로 하는 중앙처리장치(CPU),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이 대표적인 비메모리 반도체다.

하지만 비메모리는 CPU·AP에 그치지 않는다. 로직 반도체 외에도 마이크로 컴포넌트, 아날로그 칩, 센서, 광전자 등이 모두 비메모리 반도체에 속한다.

엄밀히 따지면 비메모리는 반도체를 규정하는 용어가 아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 중심으로 성장하다보니 '메모리 외의 반도체'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비메모리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WSTS)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18년 기준 연간 4600억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520조원에 달했다. 이 중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메모리 시장은 1600억달러(약 180조원)다. 비중으로 따지면 세계 반도체 시장의 35%가 메모리 시장이란 얘기다. 이는 곧 나머지 65%는 비메모리라는 것을 뜻한다.

WSTS 통계에서 메모리를 제외한 나머지 반도체를 모두 합친, 즉 비메모리 시장 규모는 지난해 3100억달러였다. 3100억달러는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340조원이다. 180조원 규모인 메모리 시장 2배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강국을 자부하지만 비메모리가 뒷받침하지 못하면 '절름발이' 신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복된 '비메모리 육성'

문재인 대통령의 육성 전략 마련 지시가 나온 것은 비메모리 산업 중요성과 시장성에 배경을 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전체 수출의 20%를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지만 반도체 수출의 70~80%가 메모리로 편중돼 균형이 필요해서다. 아울러 안정적이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수요가 꾸준해 시황 변화가 덜한 비메모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가 비메모리 산업 중요성에 주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부는 지난 20년 전부터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전략을 폈다.

대표적인 예가 '시스템 직접회로(IC) 2010' 사업이다. 1998년부터 추진된 '시스템 IC 2010'은 반도체 설계분야 전문인력 양성과 기초 기술 확보를 목표로 했다.

2011년에는 후속 조치로 '시스템 IC 2015' 사업이 마련됐다. 국내 중소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육성과 시스템반도체 설계 강국 입성을 목표로 한 이 사업은 연간 150억원 규모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팹리스 기업 중심으로 지원해 스타 기업 10개를 육성한다는 전략이었다.

2013년에는 ETRI 주관으로 시스템반도체 산업기반조성 사업도 추진됐다. 팹리스 기업의 창업 보육 인프라, 설계툴, IP, 검증환경 등의 설계 인프라 구축 및 공동 활용, 팹리스 및 수요기업 간 협력연구 체계와 성과 홍보 등을 계획했다.

정부는 비메모리 반도체, 특히 시스템반도체 분야에 공을 들였다. 시스템반도체는 연산, 제어, 전송 등 여러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칩을 뜻한다. 모바일 기기, 가전, 자동차 등에서 핵심 부품으로 부상할 것을 예상하고 육성에 나섰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현재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은 생태계 활성화가 아닌 오히려 기반이 무너진 실정이다. 시스템반도체를 설계하는 국내 팹리스 업계는 수익을 거두는 곳이 손에 꼽힌다. 반도체 설계는 우수 인재가 필수지만 중소기업 위주에 경영도 악화되면서 인력 유입이 끊기고 있다.

새로운 반도체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 등장이 사라진지 오래다. '1세대 팹리스 벤처가 여전히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다.

홍상진 명지대 교수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200개가 넘는 팹리스 업체가 있었지만, 2010년대 들어와서 약 절반으로 줄었다”면서 “10위권 아래 회사는 실적 부진 늪이 더욱 깊어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이번엔 달라질까

그동안의 정부 육성 전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국내 비메모리 산업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송용호 한양대 교수는 “정부 지원으로 인력과 기술 개발이 이뤄졌기 때문에 삼성 액시노스와 같은 AP와 LG전자 디지털 TV의 SOC(시스템온칩)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며 “돈을 썼는 데 결과가 안 나온게 아니라,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AP는 스마트폰에서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반도체다. 국내 AP는 MP3용 프로세서 개발서부터 시작돼 스마트폰, 자동차 멀티미디어 분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였다. 현재는 삼성전자나 텔레칩스 같은 소수 기업만 AP를 개발하는 실정이지만 반도체 개발 지원과 인력 양성이 있었기 때문에 고성능 제품인 AP를 만들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전략 부족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와 반도체 업계 중론이다.

홍성수 서울대 교수는 “선택과 집중을 해서 한 우물을 깊게 팠으면 지적 자산이나 인력 자산이 쌓여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남은 게 없다”며 “그동안 어떤 전략을 구사했는지 모를 정도”라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출연연 관계자도 “투자가 많이 이뤄진 것은 맞지만 금액들이 분산돼 효율적 투자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는 조만간 비메모리 발전 전략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5세대(5G) 이동통신 개막과 사물인터넷(IoT)의 발달로 새로운 시스템반도체 육성 전략이 필요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과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성수 교수는 “국내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매겨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것들과 M&A나 합종연횡을 통해 할 수 있는 분야, 미래에 할 수 있는 영역을 나눠 각기 다른 전략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며 “선택과 집중으로 차근차근 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비메모리가 세계 시장의 70%라고 해서 뛰어드는 건 시장논리를 모르고 하는 것”이라며 “사물인터넷(IoT)과 증강현실(AR) 시장처럼 새롭게 열리고 있는 분야를 겨냥해 중소 팹리스 회사들이 진출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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