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칸막이가 쳐진 책상에 빼곡히 모여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는 직원들. 음침함이 감돈다. 일부 직원은 밤샘 작업에 피곤한 듯 의자에 앉아 몸을 누이고 있다. 종합 상황실에는 실시간 거래 트랜잭션이 표기되고 종합제어실 안에서 밥도 못 먹고 외주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책상 위 달력에는 추진 중인 여러 IT프로젝트가 빼곡히 적혀있고, 사무실 한켠에는 “00 프로젝트, D-30”이란 현수막이 걸려있다.
국내 은행 IT부서 현주소다. 외주 용역 직원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최근 IT노동자의 잇단 죽음, 시행사 갑질 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그간 은행에게 IT사업은 '돈먹는 하마' '보조 역할' '전산 개발'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핀테크 시대가 도래하면서 IT 조직이 재평가 받고 있다.
오랜 관행을 바꾸기 위한 이색 실험이 진행됐다. 금융사도 글로벌 IT기업처럼, 업무부터 조직을 통째로 바꿔보자는 프로젝트다. IT 근로자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보자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KB금융지주가 국내에서 첫 실험에 착수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KB금융이 '디지털 컬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장을 갔다.
◇“아 피곤해, 좀 달려볼까”
오후 2시.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 국회의사당역 앞에 위치한 국민은행 IT센터를 찾았다. 9층에 운동복 차림의 직원들이 웃으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출입증을 찍고 들어가니 최신 피트니스 시설과 샤워장이 있었다. IT 직원 건강과 체력 증진을 위해 최근 최신 설비 피트니스 시설을 구축했다. 미세먼지 등으로 공기 질 개선에 관심이 높은 임직원 의견을 반영, 사무공간 곳곳에 공기 정화 식물도 다량으로 배치했다. 어두침침한 벽면은 화이트칼라톤의 개방형 사무공간으로 탈바꿈했다. IT소속 직원은 피트니스 센터를 자유롭게 이용하고 '헬스 브레인 스토밍'을 한다.
운동을 하고 있던 한 직원은 “IT업무만 10여년을 하다보니 체력도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자유롭게 운동도 하고 직원들과 소통할 수 있어 매일 피트니스를 찾는다”고 말했다.
◇60여개 회의실 신축, 종이와 펜이 사라졌다
IT기획부를 방문하기 위해 피트니스센터를 지나 아래층 통로를 지났다. 크고 작은 회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규모도 제각각이다. 회의실 안에는 전자칠판에 내용을 띄워 놓고 격렬한 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회의실은 6인, 10인, 30인 등 다양한 규모로 구축됐다.
상급자 위주 보고 체계를 바꾸고 회의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 KB는 IT본부에만 60개 이상의 회의실을 신축했다. 수시로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건물 곳곳에 회의실을 신축한 것이다. 각 회의실에는 클라우드PC(VDI)를 설치해 종이와 펜을 없앴다.
본인이 작성한 각종 문서와 데이터는 클라우드PC와 전자칠판 연동, 즉시 회의가 가능했다. KB는 IT그룹 전 직원 대상으로 클라우드PC 2500여대를 도입했다. 또 팀내 사무공간에도 티테이블을 통한 소형 미팅, 이동통로 내 아이디어 보드를 비치해 언제 어디서나 아이디어를 공유, 회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
KB IT본부 임원실도 개방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과거 경영진 집무실은 전면 불투명 유리로 안이 보이지 않는 '불통의 벽'이 쳐져 있었다. 최근 대대적인 인테리어 작업을 거쳐 내부가 오픈된 투명 유리창을 설치했다. 밝은색 가구와 디지털 사무기기 등을 통해 수평적이고 보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변모했다.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개인전화용 폰 부스도 설치했다. 각 층별로는 크고 작은 휴게소를 만들고 안마의자를 비치해 IT 직원의 피로를 덜어준다.
팀장, 직원 등 직책별 사무공간 차별을 없애고 외주 IT인력에게도 동일한 1인당 사무공간을 제공한다. 기존 사무공간은 팀장급이 팀원 대비 2.4배 공간을 더 차지했다. 이를 동일하게 꾸미고 남은 공간을 수납공간과 휴게 공간으로 추가 확보했다. 업무 집중도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일환이다. 직원은 업무 시간과 상관 없이 자유롭게 곳곳에 마련된 휴게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최첨단 IT기기로 중무장, 원격 영상회의 도입
한 직원이 태블릿PC로 영상회의를 하고 있다. 전남 지역본부 팀장과 IT 관련 회의가 한창이다. KB는 최근 본부부서는 물론 전국 소재 KB 네트워크(지점, 지역영업점 그룹) 대상으로 '디지털 영상회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전자보고 시스템은 물론 지리적 제한 없는 영상회의 체계를 갖춰 실시간 업무 진행이 가능해졌다.
중앙집중화 문서관리 체계도 도입했다. 'K-드라이브' 관리 시스템을 구축, 완료하고 디지털 자산 이관 작업을 진행 중이다. 문서(파일)유출 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기존 문서를 중앙저장소에 저장한다. 개인 저장공간을 모두 없앴다.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 활용하고 문서의 공유자산화와 스마트워크 환경을 도입했다.
경영진과 부서장 집무실에는 삼성전자 플립 전자 칠판을 구축했다. 임원과 직원간 애자일 조직 강화 일환으로 다양한 매체와 연동, 모든 작업문서를 전자칠판으로 불러와 즉시 업무를 가능케 했다. 기존 의사결정 시간에만 1시간 이상 소요되던 게 10분 이내로 단축됐다. 외부 업무가 많은 직원을 위한 모바일 업무 환경을 구현했다. 개인 사무공간을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 문서를 열람, 결재가 가능한 '모바일 그룹웨어'를 상용화했다.
KB금융의 '디지털 컬처' 프로젝트가 성공할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은 이번 프로젝트를 이렇게 정의했다. 한글자로는 '꿈', 두글자로는 '희망', 세글자로는 '가능성', 네글자로는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IT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길재식 금융산업 전문기자 osolgil@etnews.com, 사진=이동근기자 fot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