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국내 반도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반도체 제조 핵심 소재인 불산 수입이 일본 당국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것이다. 반도체 공정용 불산은 높은 순도가 필요해 스텔라·모리타 같은 일본 기업이 독점 생산한다. 갑작스런 수출 제한 배경을 놓고 당시 업계에선 위안부 문제와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불만을 가진 일본 정부가 '경고' 차원에서 불산 수출을 제한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불산 공급 중단은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불산이 없으면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산은 금이나 백금을 제외한 금속 대부분을 녹일 정도로 부식성이 강해 실리콘 웨이퍼상의 불순물 제거에 활용된다. 불산이 없으면 반도체 공장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후 불산 이슈는 해결됐지만 국내 반도체 산업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을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소재, 부품, 장비 등 이면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는 겉보기와 달리 '취약'하다는 점이다.
◇소재·장비의 높은 해외 의존도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매출액 기준)은 20%를 소폭 웃도는 수준이다. 후공정 장비가 40% 이상으로 그나마 높고 전 공정 장비 비율은 10% 이하로 낮다.
반도체 공정은 원재료인 웨이퍼에 집적회로를 그려 전기적 특성을 지니게 가공하는 전(前)공정과 가공된 웨이퍼를 잘게 쪼개고 완제품 형태로 패키징하는 후(後)공정으로 나뉜다. 노광, 증착, 식각 등이 전공정에 속하고 후공정은 웨이퍼 검사, 절단, 패키징 등을 칭한다. 재료 국산화율은 40%를 웃도는 수준이다. 웨이퍼, 노광용 감광액 등 많이 쓰이는 품목은 국내 생산되고 있는 상황이나 불산과 같은 핵심 소재는 여전히 해외 의존하고 있다.
장비, 소재 모두 절반도 국산화가 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 수치도 최근 낮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재료 국산화율 조사는 2011년을 마지막으로 7년째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영업비밀 유출을 우려한 수요처의 자료 비협조가 이유인 데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국내 장비와 소재 경쟁력 부족은 다른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세계 반도체 관련 제조사로 구성된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10.1%에 불과하다. 소재 업체도 9.9% 수준이다.
◇클러스터, 생태계 강화 초석돼야
지난해 10월 충북 청주에서 열린 SK하이닉스 준공식에서 박성욱 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조 라인을 소개했다. 박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1분기까지 4000대가 넘는 장비를 모두 설치하고 2분기부터 가동할 계획인 데 장비의 약 20% 만이 국산”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장비 국산화율을 끌어올리는 한편 후방산업 육성에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국내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는 미해결 과제다. 앞으로 풀어 나가야할 숙제인 셈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정부가 SK하이닉스와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이 주목된다. 국내 반도체 후방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기회이자 발판이 될 수 있어서다.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는 메모리 반도체 대기업과 소재·장비 중소기업이 동반 입주하는 단지로 구상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공장 4개를 짓고 50여개 반도체 협력사가 입주할 계획이다. 클러스터 조성으로 자발적 혁신이 일어나고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도록 유도한다는 게 정부 의도이자 기대다.
국내 반도체 업계 최고경영자도 클러스터의 긍정 효과에 기대를 표하고 있다.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을 총괄하는 진교영 사장은 지난 15일 열린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정기총회에서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삼성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클러스터에 경쟁사인 SK하이닉스 말고도 여러 반도체 협력사가 들어오는 만큼 산업 환경이 더 좋아질 것이란 취지다. 진 사장은 그러면서 “한 군데(지역)에 많은 회사가 있으면 좋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애로사항이 있다”고 덧붙였다. SK하이닉스 역시 생태계 강화를 기대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클러스터가) 경쟁력, 생태계 강화에 적합한 곳으로 선정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도 반도체 클러스터가 국내 후방 산업 경쟁력 강화에 보탬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박재근 한양대학교 교수는 “반도체 소자 업체와 장비, 소재, 부품 기업이 단지 내에 함께 있는 건 새로운 공정이나 새로운 부품, 소재를 개발하는데 바람직하다”며 “중국 추격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송용호 한양대 교수도 “반도체 산업의 경쟁성, 시급성 등을 생각하면 사업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게 도움이 된다”며 “반도체는 생태계가 중요한 시업이기 때문에 부품, 소재, 장비 등이 지리적으로 근접해있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기업 간 협력뿐만 아니라 정부 지원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재근 교수는 “중국은 클러스터를 조성하면 전력이나 용수 등 기본적인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클러스터 내에서 관세 심사를 하는 식의 일괄적인 서비스를 지원한다”며 “우리나라도 반도체 산업이 중요하고 초격차가 시급하다면 특정 부처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통합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