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2007년 10월 30나노급 64기가비트(Gb) 낸드플래시 제품을 개발, 양산을 시작했다. 이미 10년 전 얘기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대부분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은 30나노 이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6일 서울 모처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원회 반도체전문위원 심의에서 삼성 측 임원은 공개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된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보고서가 공개되면 삼성의 노하우와 국가핵심기술이 단박에 경쟁사로 유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는 공장 배치도면, 근로자 수, 유해 화학물질 목록과 해당 물질의 누출 측정 여부 등의 결과 값이 담겼다. 위원들은 보고서 내용이 회사의 중요한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는 설명에는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산업기술보호법으로 보호받는 국가핵심기술 7개(30나노급 이하 메모리 반도체 설계, 공정, 소자기술 등)와 연관됐는지를 집중 질의했다.
◇“국가핵심기술 일부 포함” 판단
결국 첫날 심의에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음날인 17일 2차 심의가 열렸다. 위원들은 이날 보고서 중 일부 내용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공장 레이아웃과 화학물질명을 통해 30나노 이하 메모리 반도체 생산 기술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포함된 화학물질명을 추론하면 공급업체와 물질점도 정보 등을 알 수 있다.
이번 위원회 결정이 보고서를 공개키로 한 고용노동부의 결정을 가로막을 순 없다. 다만 삼성은 고용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에서 이 결정을 중요한 증거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국가핵심기술이라는 판단이 나온 만큼 소송 등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됐다고 산업계는 분석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그간 보건 분야 전문가들이 얕은 지식으로 첨단산업 분야 자료 공개 여부를 심의한 것 자체가 문제”라면서 “이제라도 정확한 판단이 나왔으니 국가 핵심 자산을 무차별적으로 공개하려는 움직임은 자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중앙행정심판위원회도 삼성전자가 제기한 기흥·화성·평택·온양공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 정보공개 집행정지신청을 수용했다. 따라서 정보공개 청구인에게 제공하려했던 삼성전자 보고서는 본안 행정심판 결과가 나올 때 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산업계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고용부는 국가핵심기술을 공개하려 했던 셈”이라면서 “국가핵심기술 여부와 관계없이 산재 입증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 민간 기업 내부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고용부·여당 의원 '더 쎈' 산안법 개정안 마련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더 큰 해결과제가 남아 있다. 산업계는 고용부와 여당 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통과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고용부는 지난 2월 기업의 정보 공개를 법으로 강제한 산안법 전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법안에는 기업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고용부에 제출하고, 고용부는 제출받은 자료를 전산으로 공개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이 경우 경쟁사나 경쟁국이 우리 기업의 물질 활용 여부를 온라인 상에서 손쉽게 알 수 있게 된다.
고용부는 현 김영주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시절 발의한 산안법 개정안과 강병원·신창현 의원 등의 발의로 국회에 묶여 있는 산안법 개정안을 병합해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도 보이고 있다. 김 장관과 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 병합 통과될 경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물론 역학조사 결과, 유해위협방지계획서, 공정안전보고서 등 각종 기업 기밀 자료가 공개 청구 대상에 포함된다. 이들 보고서에는 공정 흐름도, 장비 목록, 배치, 건축물 평면도, 공정설계 같은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 보다 더 많은 기밀이 포함된 자료를 법으로 아예 못 박아서 공개하려 하는 것이 지금 고용부와 여당 의원들의 움직임”이라면서 “해당 자료가 만약 중국으로 유출되면 단숨에 따라잡히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