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비자들은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태, 2015년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을 겪으며 분노와 좌절을 동시에 느꼈다. 사태를 대하는 글로벌기업 태도는 무책임했고, 우리 정부 대응·처벌은 무능에 가까웠다. 한국은 '글로벌 호갱(호구 고객)'이라는 자조까지 나왔다.
글로벌기업 횡포 대상은 소비자에 그치지 않는다. 글로벌기업와 거래하는 수많은 한국 기업 또한 피해 당사자다.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글로벌기업은 한국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악용, 불공정행위를 반복하며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우리 국민, 기업 요구는 단순하다. 불공정 글로벌기업이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정부가 제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다른 나라와 동등하고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받아야 하는 건 현대 사회 상식이다. 전문가들도 피해에 합당한 처벌과 보상만이 한국을 '놀이터'로 여기는 글로벌기업의 안하무인 태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소비자는 '안중에 없다'
애플 아이폰 10주년 기념작 아이폰X(텐)은 우리나라에서 미국, 일본보다 20만원가량 비싸게 판매된다. 그러나 애플코리아는 어떤 근거도 내놓지 않는다. 아이폰8 플러스 스웰링(팽창) 현상으로 소비자가 불안에 떨 때도 애플코리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아이폰 한국시장 점유율이 20%에 달하지만 한국 소비자는 기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 소비자를 무시하는 글로벌기업은 애플만이 아니다. 배출가스 조작 사태로 파문을 일으킨 폭스바겐, 가습기 살균제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옥시, '살인서랍장' 논란을 일으킨 이케아도 마찬가지다.
폭스바겐의 차량 리콜은 우리 정부의 리콜명령 14개월 만인 올해 1월에야 시작됐다. 폭스바겐은 리콜명령을 받고도 1년 넘게 부실한 자진 리콜 계획서를 제출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일으킨 옥시는 미흡한 피해 보상으로 한국 소비자 원성을 샀다. 이케아는 서랍장 전도(쓰러짐) 현상 늑장 대응에 이어 복잡한 절차 때문에 리콜 회수율이 낮다는 지적을 받는다.
글로벌기업의 비상식적 소비자 대응은 꾸준히 문제로 지적되지만 개선은 요원하다. 전문가들은 한국을 '하찮은 시장'으로 보는 글로벌기업 인식과 더불어 미약한 우리 법·제도를 원인으로 꼽았다.
미국은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배상 의무를 지우는 징벌적 손해배상, 피해를 본 소비자가 승소하면 다른 피해자도 모두 배상받는 집단소송제 등 소비자 권리 보호 제도가 활성화됐다. 소비자 문제를 가볍게 보는 기업은 당장 경영이 어려워질 만큼 강력한 제재가 가해진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제재 수위가 약하고 적용도 제한적이다. 집단소송은 증권 분야에만 도입됐고, 징벌적 손해배상 역시 하도급법 등 일부에만 적용된다.
소비자 문제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글로벌기업이 세계 각국에서 같은 문제를 일으켜도 한국 소비자만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것은 한국 내 제재가 약하기 때문”이라면서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계기로 제재 강화 움직임이 생겨났지만 큰 기대를 갖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도 피해자…공정위 조사 방해 '심각'
글로벌기업 횡포 대상에는 힘없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도 포함된다.
애플의 '광고비 떠넘기기'가 대표 사례다. 한국 이동통신 회사들은 아이폰 기능·디자인을 알리는 TV광고 비용을 애플 대신 내고 있다. 통신사를 광고하는 시간은 말미의 1초 전후에 불과하다. 업계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전형적 횡포'라고 지적했다.
공정위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 지난해 조사에 나섰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최근 재차 현장조사를 벌여 제재가 임박했다는 추측만 나올 뿐이다.
구글은 한국 휴대폰 제조사가 '변종 안드로이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휴대폰 제조사가 구글 애플리케이션을 선탑재하려면 변종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다른 모바일 기기를 공급할 수 없도록 한 반(反)파편화조약(AFA)이 문제로 지적된다. 역시 공정위가 조사 중이다. 이 밖에 비자카드, 오토데스크 등 다수 글로벌기업 불공정거래 혐의가 접수돼 공정위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기업 횡포는 공정위 조사 과정까지 이어진다. 공정위 현장조사 때 한국사무소 직원은 본사에 책임을 떠넘기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정위가 본사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면 이런 저런 핑계로 제출을 미루거나 빈약한 자료를 제출해 조사를 방해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공정위 관계자는 “(글로벌기업) 본사 방침을 핑계로 이뤄지는 조사 방해가 상당히 많다”면서 “현실적으로 외국 현지로 나가 조사하기도 어려워 협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사실상 방법이 없는 실태”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2015년 마련한 사건처리 절차 개혁방안(사건처리 3.0)이 스스로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건처리 3.0에는 피조사업체 권익 보호를 위한 방안이 다수 포함됐다. 피조사업체 신청 시 모든 조사 과정에 변호사 참여, 범위를 벗어난 조사에 대한 거부권 보장 등이 대표적이다. 글로벌기업은 이를 악용, 정당한 조사마저 교묘하게 피해나가고 있다.
다른 공정위 관계자는 “글로벌기업은 '절차 정당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건처리 3.0을 악용할 소지가 크다”면서 “사건처리 절차 개선방안이 실제로는 조사에 걸림돌이 되는 때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합당한 강력한 제재가 해법…조사 역량 강화해야
글로벌기업 불공정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해법은 그에 따른 제재다. 외국처럼 '강력한 제재'는 아니더라도 합당한 제재는 반드시 가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공정위 글로벌기업 제재는 솜방망이 수준에 그쳤다. 불공정 유지보수 계약 혐의를 받았던 오라클에 공정위는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유럽연합(EU)이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한 구글의 '앱 선탑재' 불공정 혐의에 대해서도 공정위는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했다.
공정위는 애플의 각종 불공정약관을 시정했지만 '시정권고'에 따른 '자진시정' 형태가 돼 애플은 별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 소프트웨어(SW) 기업 SAP의 불공정 혐의에 대해서는 동의의결을 적용해 면죄부 논란이 일기도 했다. SAP 동의의결은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문제로 지적돼 공정위가 재검토에 나섰다.
과징금의 대폭 상향 필요성이 제기된다. 법 위반 기업에 대한 공정위 조치는 시정명령, 과징금 부과, 검찰 고발이 대표적인데 이 가운데 과징금이 가장 실효성 있는 수단으로 꼽힌다. 기업이 법을 어겨 취한 이득보다 훨씬 많은 과징금을 물려야 법 위반 억지력이 생긴다는 평가다. 김상조 공정위원장 취임 후 과징금 상향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공정위 조사 역량 강화도 과제로 꼽힌다.
글로벌기업 사건은 복잡·다양하고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사안이 많아 전문지식을 필요로 한다. 최근 이슈로 떠오른 빅데이터 독점, 알고리즘 담합 등은 공정위에 생소한 영역이다. 거액을 들여 대형 로펌과 손잡고 사건에 대응하는 글로벌기업과 비교해 공정위 역량이 부족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정위 근무 경험이 있는 한 기업 관계자는 “빠른 기술 발전과 이에 따라 발생하는 새로운 불공정행위 유형을 공정위가 따라가기 힘든 게 사실”이라면서 “자체 조사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외부 전문가, 다른 나라 경쟁당국 등과 협력을 적극 넓혀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