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항암 성분을 허가기준보다 매우 적게 넣거나 아예 넣지 않은 가짜 암치료제를 10여 년간 대량 판매해온 사건이 적발됐다. 불량 약을 복용해온 수천 명 암 환자들이 분노와 공포에 떨고 있으며, 일부 의사와 환자는 아직 가짜 약을 공급받은 사실조차 통보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파문이 확산된다.
공영 ARD방송 등에 따르면, 독일 서부 보트로프시 알테 아포테케라는 대형 약국의 한 약사가 오랫동안 암치료약 성분을 기준치 평균 5분의 1로 희석해 병·의원에 납품해온 사실이 적발됐다. 페터 S.라는 이름의 이 약사는 치료 성분을 아예 넣지 않고 생리식염수나 포도당으로 채운 주사액을 만들어 판매했다.
독일에서는 약국도 시설과 전문가를 갖춘 경우 허가를 받아 원료약을 제약회사에서 들여다 가공해 판매할 수 있다. 153년 역사의 이 약국 종업원은 약 90명이다. 관련 전문가를 두고 항암제 등도 가공 판매하는 독일 200여 대형 약국 중 하나다.
검찰 수사결과 이 약사가 성분을 조작해 만든 약은 2012년 이후에만 6개 주, 37개 병·의원에 납품됐다. 최소 3700명 이상 암 환자가 복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량 조작 약품을 포함해 처방전 약 5만 장을 과다 청구해 건강보험업체들이 입은 손해액만 5600만 유로(약 764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검찰이 당장 기소에 필요하고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범죄행위만 수사한 것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조작은 2005년에 시작됐고 49개 병·의원을 통해 7300여 명의 환자가 불량 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최근 검찰 기소를 언론이 보도하면서 사건이 알려졌으나 가짜 약을 복용한 환자들의 전반적인 병세 경과나 사망 여부 등은 아직 조사되지 않은 상태다. 사건이 수사 당국에 적발된 뒤 9개월이 넘도록 문제 약을 공급받은 병·의원이나 환자 중 상당수가 이를 통보받지 못하는 등 보건당국의 대응조치가 미비해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가짜 약을 공급받은 병·의원이 가장 많은 노르트라인페스트팔렌(NRW)주 보건부는 16일에야 불시 조사를 포함해 약국들에 대한 감시·통제를 강화하고 환자들에게 일일이 통보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환자보호기금(DSP)은 독일 전역 200개 대형 약국들에 대한 조사와 감시 강화를 촉구했다.
이 약사의 조작 행위는 지난해 같은 약국 종업원 2명이 원료의약품 구매 장부와 약품 판매장부를 대조하는 과정에 암 치료제 구매량이 판매량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점을 발견하면서 드러났다.
조작에 사용한 수액백 등의 증거물을 찾아내 당국에 고발했고, 검찰은 지난해 11월 이 약사를 체포했다. 이 약사는 사기와 상해, 살인죄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는데 약국 주인 등과의 조직적 공모 혐의 등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이 약국은 주인이 바뀐 채 계속 운영되고 있으나 항암제 생산은 중단했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