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1세대 인터넷 기업 엔비디아가 각광받고 있다. 엔비디아는 PC용 그래픽카드로 일반 소비자에게도 잘 알려진 업체다. 그래픽카드 업체가 4차 산업혁명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유추하기 쉽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AI), 자율주행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은 빠른 대용량 데이터 처리를 필요로 한다. 엔비디아는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데 강점이 있는 그래픽카드 기술을 앞세워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고 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최근 “엔비디아가 IoT, 자율주행차 등 시스템반도체 신사업 분야를 완전히 선점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매출 69억달러, 영업이익 19억3400만달러를 기록했다. 2015년보다 매출은 38%, 영업이익은 159% 각각 급증했다. 주가는 더 가파르다. 10일(현지시간) 현재 주가는 113.62달러로 1년 전(25.43달러)보다 347% 뛰었다.
엔비디아는 1세대 인터넷 기업이다. 1993년에 설립돼 마이크로소프트(MS)가 주도하는 윈도 생태계가 막 꽃피우던 시기에 태동했다. 엔비디아 창업자는 대만에서 태어난 젠슨 황이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오리건대와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후 엔비디아를 설립했다.
엔비디아는 초창기에는 중앙처리장치(CPU)를 주로 제작하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인텔의 아성을 뚫지 못했다. 엔비디아는 설립 후 4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해 투자금이 거의 거덜 날 위기에 처했다. CPU가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한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라는 틈새시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95년 최초의 그래픽 칩셋 NV1이 출시됐다. 1997년에 출시된 RIVA128이 크게 인기를 얻고 1998년 RIVA TNT, 1999년 RIVA TNT2 제품군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경쟁사이자 부두(Voodoo) 시리즈로 유명한 3dfx를 제친다. 이후 2000년에는 3dfx 지식재산권을 인수하며 GPU 업계 선두로 우뚝 섰다.
CPU의 주요 역할이 알고리즘을 실행하고 시스템을 제어하는 것이라면 GPU는 단순 계산을 주로 담당, CPU 부담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엔비디아는 세계 GPU 시장 80%를 점유한 최강자다.
GPU는 그래픽 연산 특성 상 대량의 단순 계산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고속병렬연산`에 최적화돼 있다. PC에 사용되는 CPU가 높은 클럭을 이용해 순차로 들어오는 데이터 처리에 특화됐다면 GPU는 수천개의 코어를 바탕으로 동시에 여러 연산을 처리하는 병렬 처리에 유리하다. 엔비디아는 GPU에 필요한 고속 병렬 연산 기술에 전사 차원으로 매달렸다.
게임의 3D 그래픽 연산 처리를 위해 등장한 GPU는 CPU의 도움 없이 폴리곤의 변형 및 광원 효과 자체 처리 역할을 담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병렬 컴퓨팅 처리 방식을 게임 이외의 범용 연산 처리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GPU 컴퓨팅은 응용과학 기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다중 연산에 최적화된 GPU의 강점을 살려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구현되는 첨단 기술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에 따라 고속 병렬 연산 기술이 엔비디아의 핵심 자산이자 4차 산업혁명의 뿌리가 됐다. 고속 병렬 연산은 이제 그래픽카드에만 쓰이지 않는다. 슈퍼컴퓨터에서 고속 연산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GPU이다. 지난해 3월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결을 펼친 구글의 AI 시스템 `알파고`가 대표 사례다. 알파고는 1920개 CPU와 280개 GPU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그 가운데 176개가 엔비디아 GPU다.
GPU 분야에서 엔비디아는 독보 존재다. 그래픽카드는 물론 AI와 클라우드 서비스, 자율주행차 등 차세대 산업에서도 중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GPU 점유율이 80%에 이른 점을 감안하면 경쟁 상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엔비디아는 GPU의 활용도를 단숨에 AI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딥러닝은 많은 데이터를 이용, AI를 학습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많은 학습 데이터를 반복 학습시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이유로 컴퓨팅 파워가 약한 CPU는 대량의 학습 데이터 처리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에 따라 눈부시게 빠른 학습을 위해 그래픽카드에 사용되는 GPU를 이용, 딥러닝 성능이 크게 향상됐다. GPU는 3000개 이상 처리 코어로 되어 있어 동시에 딥러닝에 사용되는 수치 계산을 할 수 있다.
이제 자동차는 스마트카 시대로 접어들었다. 카메라, 센서, 레이더 등을 잘 다루고 자동차와 완벽히 연동하는 정보기술(IT)이 핵심으로 떠올랐다. 자율주행차 시장이 아직 본격 개막하지 않았는데도 엔비디아의 차량용 반도체 매출이 연간 38%라는 높은 성장세를 보인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앞으로 폭풍 성장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글로벌 내비게이션 업체와 AI 기반의 자율주행용 클라우드 매핑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또 AI를 기반으로 한 로봇 생산성 향상과 공장 자동화 시스템 개선을 위해 로봇 제조 선두 기업 화낙과 기술을 제휴했다. 현대자동차의 차세대 오디오·비디오 내비게이션 플랫폼용 프로세서 공급사로 선정되는 등 자동차 시장에서도 보폭을 넓히고 있다. 아우디와 볼보의 자율주행차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IoT 분야에서는 구글과 협력하며 고객사 기반을 꾸준히 넓히고 있다.
반도체 업계는 엔비디아가 기술력을 앞세워 독자 시장을 구축하고 미래 시장 투자를 지속한 게 성공 비결이라고 말한다. 미래를 예측해 방향성을 잘 잡고 투자를 지속해 온 것이 4차 산업혁명과 맞아떨어지며 빛을 발하고 있다.
스타트업과 신생 기업들은 이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개선하기 위해 앞 다퉈 AI를 활용하고 있다. 엔비디아와 딥러닝을 위해 협력하는 기업은 3400여곳에 이른다.
AI 영역은 앞으로 의료, 유통, 운송, 금융 분야까지 넓어질 전망이다. 조사 기관 IDC는 세계 AI 시스템 시장은 오는 2020년까지 연평균 55.1%의 성장세를 보이며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 규모는 지난해 80억달러에서 2020년 470억달러(약 56조8000억원)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됐다. 이에 따라 GPU 수요가 늘어 엔비디아의 성장이 꾸준히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엔비디아가 GPU로 선회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최고 결과로 돌아왔다. 고속 병렬 연산 기술의 고도화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꽃을 피웠다. 차선의 선택이었지만 기술의 흐름을 믿고 연구개발(R&D)에 집중한 결과가 전화위복으로 됐다. 엔비디아의 미래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