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
64K D램 개발을 완료한 후 한국 정부와 삼성은 이 사실의 공개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공개한다면 미국, 일본이 한국과 삼성을 극도로 경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6개월 만에 개발 완료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이는 반도체 산업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미·일 양국의 선발 반도체 업체는 2~3년 전에 64K D램을 생산, 무서운 기세로 판매량을 늘리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과 삼성을 경쟁국, 경쟁자로 인식하면 수출은 물론 장비 및 재료 등 후방산업 분야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삼성은 비록 경계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64K D램 개발 사실을 발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세계 시장 확보를 위해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의 64K D램 개발 발표는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안겨 준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우려대로 삼성이 64K D램을 본격 생산하자 일본은 덤핑 출하를 불사하며 삼성의 세계 시장 진입을 견제했다. 이는 엉뚱하게도 미국이 일본 업체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는 사건으로 연결됐다. 미국이 일본 반도체 기업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며 공세를 퍼붓는 사이에 일본의 256K D램 투자와 생산에는 공백이 생겼다. 삼성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펼쳐진 것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