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연 대개혁] <1>솜방망이 처벌에 부패 행위 반복…막가는 연구기관

“정부 출연 연구기관(출연연)은 애매한 연구와 애매한 연구 결과만 있다.”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국가 연구개발(R&D)과 정책 방향을 제시하며 출연연을 비판했다. 매년 5조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되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질타였다. 세계 권위의 과학학술지 네이처는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장 많은 연구비를 투입하고도 노벨상을 단 한차례도 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와중에 출연연 연구원의 탈·불법으로 사정 기관 수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책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한국형 발사체 개발도 일정을 지키지 못해 차질이 예상된다.

출연연이 총체적 부실에 직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40년 전에 만들어진 출연연 시스템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때 국가과학기술 산실이던 출연연이 변화된 시대에 맞춰 개혁하지 않으면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자신문은 출연연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짚어 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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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직원이 만들어 놓은 성과를 정규직 상급자가 가로채 인센티브를 챙겼다. 비정규직 직원은 상실감에 회사를 떠났다. 상급자는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바꿨다.”(A 출연연 관계자)

정부 출연연구기관 도덕성 해이를 단면으로 보여 주는 증언이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정부가 감사의 칼을 휘두르면 조심하는 건 그때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도덕성 해이가 기승을 부린다.

18일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출연연 5개 기관에서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연구원 90명이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가 적발됐다. 한국화학연구원 연구원 A씨는 연구 과제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나 신물질기반기술연구센터 논문 실적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주 저자로 올렸다. 한국화학연구원 센터장은 2011년 1월∼2011년 12월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채 민간업체로부터 매달 250만원씩 총 3000만원 기술자문료를 받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에 저자로 표시된 소속 연구원 663명 가운데 28명이 연구과제에 참여하지 않아 과제참여율이 전혀 없는데도 논문 주 저자로 표시했다. 한국전기연구원도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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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R&D혁신토론회가 4일 한국기계연구원 대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자 수입 예산을 100억원이나 눈속임해 직원 인센티브 잔치를 벌인 기관도 있었다. 출연연은 이자와 기타수입 예산을 편성할 때 직전 3년 결산 평균액으로 짜야 한다. 그러나 이자 수입 예산을 대폭 줄여 결산잉여금을 만들고, 이를 직원 능률성과급 재원(인센티브)으로 썼다.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국가보안기술연구소 등이다.

ETRI는 2012~2014년에 3년 결산 이자 평균보다 매년 많게는 100억원, 적게는 76억원을 축소 편성했다. 그 결과 결산잉여금이 3년 총합 155억원이 됐다. 이 가운데 35억원은 직원들 주머니로 들어갔다. 기계연구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해 3년 동안 직원들에게 9억4000만원, 생기원은 7억 5700만원, 지자연은 3억원, 국보연은 4600만원을 각각 직원 인센티브로 줬다.

법인카드 부정 사용은 단골 소재다. 생기원 임직원 38명은 2009년 1월부터 2013년 말까지 유흥주점에서 법인카드로 154차례에 걸쳐 4200만원을 쓴 것이 감사원에 적발됐다. 이들은 법인카드 결제가 가능하도록 일반음식점으로 위장 등록된 유흥업소에서 사용했다. 유흥주점이나 칵테일바에서 회식을 하고 분할 결제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은 2013년 법인카드 부정 사용 내역이 적발됐다. 이들은 법인카드와 연구비 카드를 객관성을 담보할 증빙 자료 없이 휴일, 심야, 제한 업종에 사용했다. 정부는 부당사용액 14건 268만9500원을 환수 조치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도 2008~2012년 감사에서 법인카드 부정 사용이 걸렸다. 총 284명이 2억6800만원을 유흥주점이나 노래방 등에서 사용했다.

법인카드 비리는 매년 반복된다. 문제는 솜방망이 처벌이다. 감사에 걸려도 주의, 경고 등 가벼운 처벌에 그치다 보니 부정 사용이 그치지 않는다.

인사 비리도 적지 않다. 한국뇌연구원은 경영기획실장 자리를 내정하고 특별채용을 진행, 올해 미래창조과학부 감사에 걸렸다. 채용 특혜를 받은 사람은 3개월 정직을 받은 후 뇌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채용 특혜를 준 인사실장은 견책이라는 가벼운 징계를 받고 끝났다.

2012년에는 KBSI 원장이 비자금을 조성하고 금품을 수수, 해임당한 사례도 있었다. 당시 원장은 취임 이후 주요 보직자에게 비자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이렇게 모아진 비자금을 골프장과 주점 등에서 사용했다.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조카딸과 동서가 KBSI에 채용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출연연에서는 비리를 저질러도 보직을 달 수 있다. 국회는 출연연 보직자 징계 현황을 공개하며 지적했다. 징계를 받은 사람 가운데 보직을 달고 있는 사람은 지난해 10월 기준 62명에 달했다. 해임과 같은 강력한 중징계인 `정직`을 받은 사람들도 보직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국가핵융합연구소, 재료연구소, 한국화학연구원, 한의학연, 국보연, 기계연 등 7개 출연연 총 8명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부패를 저지른 사람에게 징계 처분 외에도 승급·보직 제한 등 다양한 불이익을 부과,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적용되지 않고 있다.

출연연마다 다른 내부 징계 규정도 문제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연구원마다 적용하는 징계 규정이 다르다.

이 때문에 미래부는 지난해 12월 출연연 징계 규정을 통일시키려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각 출연연의 특성을 고려, 가장 기본이 되는 `뼈대 규정`만 가이드라인에 넣었다. 미래부 감사과는 “가이드라인이 국민 눈높이에서 부당하지 않고, 징계 규정 수준이 공무원보다도 낮은 수준”이라는 입장이다. 징계 가이드라인 통일 목표 시점은 5월 말이었으나 이를 훌쩍 넘겼다.

미래부 산하 70여개 기관 가운데 공공연구노동조합 산하 출연연은 지부별 의견을 모아 미래부 가이드라인 `수정안`을 제시했다.

송혜영기자 hybrid@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