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반도체 연구개발 예산 사라지나

반도체 연구개발(R&D) 국가 예산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정보통신진흥기금을 관리하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산업통상자원부에 배정하는 내년도 예산을 40% 삭감했기 때문이다. 연간 1000억원이 넘는 산업부 R&D 자금을 일반예산에서 충당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 R&D 사업이 존폐위기에 처했다.

미래부는 내년도 산업부에 배정하는 정보통신진흥기금을 540억원대로 책정했다. 당초 1100억~1200억원을 배정했으나 올해 950억원대로 줄인 데 이어 내년도 예산도 540억원대로 절반가량 줄였다. 기획재정부 최종 심의가 남았지만 현실적으로 예년 수준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산업부 배정 예산 왜 매년 줄어드나

정보통신진흥기금은 주파수 할당 대가, 정부 출연금, 기간통신사업자와 기타 사업자가 부담하는 부담금 등으로 조성한다. 정보통신 분야 R&D, 인력 양성, 기반조성 등에 사용한다. 과거 기금 관리를 정보통신부가 했으나 부처 해체 이후 관리 주체가 지식경제부로 바뀌었고 미래부가 출범하면서 현재 관리를 맡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지경부가 지난 2013년 미래부로 바뀌었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은 현 산업부로 배정됐다. 이 때문에 정보통신진흥기금을 미래부와 산업부가 함께 사용한다.

기금 중 정보통신연구기반 구축 사업을 살펴보면 이 분야 예산은 2013년 270억원, 2014년 249억원, 2015년 284억원으로 큰 변동이 없다. 이 중 산업부 소관 사업은 2014년 124억원에서 2015년 96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전체 예산이 소폭 증가했지만 산업부 관련 사업 예산은 줄어든 셈이다.

실제로 시스템반도체 산업기반조성 지원사업은 2014년 48억원에서 2015년 36억원으로, 반도체 장비재료 성능평가 사업은 10억원에서 8억원으로 감소했다. 반도체 전자설계자동화(EDA) 툴 지원사업 역시 예산이 줄었다.

산업부에 배정하는 내년도 정보통신진흥기금이 큰 폭으로 줄어들면 기존 사업 축소가 불가피하다. 특히 EDA 툴 지원사업은 매년 예산이 줄어 반도체 분야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표 분야 중 하나다.

미래부는 최근 사물인터넷(IoT), 로봇 등에 지원을 늘렸다. 정보통신진흥기금 조성 취지에 맞게 정보통신 분야에 투자 비중을 계속 높일 계획이다. 반도체 R&D는 산업부가 일반 예산에서 배정하거나 별도 기금을 조성하는 게 적합하다는 판단이다. 여기에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반도체 산업 선두여서 더는 정부 지원이 필요 없다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2016년 신규사업 여력 ‘제로’ 위기

내년도 예산이 급격히 줄면서 신규 사업은 아예 시작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기존 사업을 마무리하려면 빠듯하게 자금을 운용해야 하는 상황으로 신규 사업에 배정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신규 지원 사업을 중단하라는 의미나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았다.

국내 반도체 시장은 국내 대기업이 세계 1위여서 국내 산업 경쟁력도 세계적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이 때문에 자금 지원을 받기가 어려웠는데 내년부터 신규 지원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결국 실질적 지원이 사라지는 셈이다.

다른 관계자는 “신규 사업 없이 기존 사업만 운영하면 향후 5년 내에 반도체 분야 R&D 지원 사업이 하나도 안 남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업계는 정부 지원 사업이 줄어들면 주로 참여해온 중견·중소기업이 곧바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여건상 중장기 연구를 하기 힘든 중소기업이나, 실패 확률이 높지만 성공했을 때 큰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연구를 위해 정부 자금을 수혈해 신기술을 개발한다. 이 지원이 끊기면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어질 뿐더러 기업 속성상 단기 연구에 매달리게 돼 중장기적 기술 경쟁력을 위한 시도가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분야는 산업을 공격적으로 육성하는 중국 정부와 달리 소수 대기업에 산업 경쟁력을 맡긴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앞선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어 마치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후방산업인 장비, 재료, 부분품 분야는 여전히 미국, 일본 등 해외 선진국 의존도가 높다. 국내 반도체 장비 기업 중 해외 반도체 제조사에 장비를 납품하는 곳은 거의 없다. 비메모리인 시스템반도체는 중국에 추월당했지만 IoT 등 영향으로 메모리보다 더 큰 시장으로 성장할 미래 먹거리다.

한 업계 관계자는 “어느 부처에서 예산을 받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체계 문제 때문에 핵심 산업이 정부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특히 정부 사업은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을 발굴·육성하는 역할이 큰 만큼 지속적인 지원 체계를 반드시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