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수 칼럼]은행가와 기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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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사람. 썩은 나무다리 따위 개의치 않는 사람. 은행가 미덕이 신중함이라면 기업가 미덕은 두려움 없는 도전이다. 달라도 너무 달라 상극에 가깝다.

이 둘이 산업사회에서 서로 없이 못 사는 사이가 됐다. 은행에 기업은 안정적 수익원이다. 기업은 은행 도움 없이 경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둘 관계가 수평적인 것은 아니다. 한 푼이 아쉬운 기업가가 칼자루를 쥔 은행가 눈치를 본다.

기업가가 우위인 적도 있다. 개발독재 시절이다. 정부는 은행을 기업 지원기관쯤으로 여겨 대출을 족쳤으며, 기업은 빌린 돈으로 막대한 투자를 했다. 대기업 특혜와 부실 논란도 있었지만 이 덕분에 산업을 더 빨리 키웠다. IMF 관리체제 이후 다시 은행가 우위로 돌아섰다.

박근혜정부가 옛 성공 모델을 기술금융으로 재현하려 한다. 기술력 있는 기업에 담보 없이 대출하는 은행 순위를 매겨 공개하고 성과 보수에 반영한다. 압박과 닦달이 장난이 아니다. 정책금융이라는 당근도 내놨다. 효과는 즉각적이다. 기술기업 대출 금액이 11월 말까지 4개월 사이 30배나 뛰었다. 은행마다 전담조직 신설과 인력 확충이 한창이다.

보수적인 은행이 가진 게 기술뿐인 기업을 이렇게 챙기다니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오래 갈 것 같지 않다. 지난 정권 녹색금융이 그랬듯이 기술금융도 시늉에 그칠 가능성이 짙다.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는 은행가다. 기술금융은 전혀 맞지 않는 옷이다. 돈을 주는 은행도, 받는 기술기업도 안다.

기술금융 본질은 대출이 아닌 투자다. 위험과 비례해 보상이 크니 지분에 투자한다. 주체는 따라서 은행이 아닌 벤처캐피탈, 금융투자회사, 투자은행(IB)이다. 최근엔 대형 기술기업도 가세했다. 이 큰손들이 투자한 기업이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로 대박이 난다. 다른 기술기업 에도 돈이 몰린다. 기술금융 생태계가 생긴다.

우리나라에서 맥을 못 춘다. 오죽했으면 정부가 은행을 강제로 끌어들일까. 그래도 정공법은 아니다. 역기능이 우려된다. 은행은 제2의 모뉴엘 사태를 거론하지만 싫은 내색일 뿐이다. 엄살이다. 기술금융 생태계 훼손이 더 걱정이다.

투자를 받아야 할 기술기업이 손쉽게 대출을 받으면 벤처투자 시장이 더 위축된다. 기술기업도 현실에 안주한다. 기업가정신을 키우기는커녕 되레 죽이는 꼴이다.

기술금융을 활성화하려면 벤처 투자자가 제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고, 관련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 그래야 투자가 늘고 생태계도 살아난다.

은행은 벤처 투자자가 키운 기술기업이 더 성장하도록 자금을 빌려주며 이자나 챙기는 게 제격이다. 다만 은행이 담보도, 기술도 아닌 신용 대출에 집중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그래야 은행 스스로 혁신한다. 보이지 않던 우량 기술기업도 보일 것이다. 이 때 은행도 기술금융에 뛰어들 자격이 생긴다.

정부가 기술기업을 이토록 챙겨주니 고마운 일이다. 은행 대출은 당장 메마른 벤처 생태계에 한줄기 소나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머잖아 기술기업과 그 생태계에 독이 된다. 기술 창업은 빚이 아니라 투자를 받아 하는 것이다.

지식산업사회다. 기술 창업가가 현 시대 기업가를 상징한다. 이들이 또다시 은행가 이자놀이에 갇히면 기업가정신도 매몰된다. 지식산업도, 금융산업도 함께 망가진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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