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한 대학 교수다. 논문을 보내달라는 국제학술지 스팸 메일에 항의해 욕설로 도배한 논문을 보냈다. 제목, 내용, 도표, 참고문헌까지 온통 ‘당신네 빌어먹을 메일발송 목록에서 날 빼라(Get me off Your Fucking Mailing List)’는 문장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덜컥 심사를 통과했다. 컴퓨터과학 저널을 사칭한 사기로 보인다. 비영리기관 도메인(.org)을 써 진짜보다 그럴 듯했다. 돈을 보내면 논문을 싣겠다는 마각을 숨길 수 없었다.
지난주 SBS가 보도한 ‘웃픈(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통렬한 조롱이 유쾌하다. 논문으로 사기를 치는 현실은 씁쓸하다. 학위 논문 심사에 웃돈을 오가며,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논문을 무조건 신봉하는 우리 대학가가 떠올라 마냥 웃을 수 없다.
그저 참고용일 뿐인 SCI 논문이 우리나라에서 ‘절대반지’다. 이게 없으면 대학이든 교수든 낙제를 면할 수 없다. 논문 수가 아닌 영향력을 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자 교육부는 BK21플러스사업 공학 분야부터 논문 수 지표를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인용 많은 SCI 논문이 곧 높은 연구 역량을 뜻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를 비롯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라면 되레 반비례할 가능성도 있다. 늘 새 기술이 쏟아져 나온다. 이를 따라잡기에도 바쁜 교수들이 아까운 시간을 SCI 논문에 매달린다. 가뜩이나 차이가 나는 외국 교수와의 신기술 습득·연구역량 격차가 더 벌어진다.
개발자들은 SCI 논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구닥다리 주제에 현안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개발자 커뮤니티와 학회에 나온 ‘코멘트’나 ‘리뷰’라면 귀를 기울이다. 전문가들이 모인 곳에서 축적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발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명성을 얻은 교수를 정작 교육과 대학 당국만 알지 못한다.
콘퍼런스 발표도 마찬가지다. 곧바로 평가를 받는 자리여서 공을 들여야 한다. 특히 기업 개발자 발표 내용은 풍부한 데이터와 현실적 해법이 가득하다. 하지만 ‘아카데믹하지 않다’는 이유로 심지어 공대 교수로부터 폄하를 받는다. 이 교수들은 SCI 논문보다 평가 점수가 낮아 콘퍼런스 발표를 꺼리는 속내를 결코 내보이지 않는다.
정부 발 공대 혁신이 본격화했다. 지난 8월엔 현장 중심 공대 교육과 연구, 산학협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재정 사업과 교수 평가를 바꾸는 혁신안을 내놨다. 비로소 SCI 논문이 없이 산업체 경력만으로 교수가 될 길이 열렸다. 그러나 매우 좁은 문이다. 극히 일부 대학의 생색내기 임용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산업계를 여전히 아래로 보며 높이 쌓은 상아탑에 안주한 공대 교수들이 여전히 많다. 산업계 출신 교수도 머지않아 SCI 논문에 더 신경을 쓸지 모른다. 교수 업적 평가에 여전히 SCI 논문 비중이 크다.
물론 산학협력보다 학술이 중요한 공학 분야가 분명 있다. 중장기 연구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학 분야에서 동료 평가, 산학협력으로 교수 연구와 업적을 충분히 평가하고도 남는다.
SCI 논문은 대학과 교수를 평가하는 잣대가 전혀 없던 시절에 의미가 있었다. 대학도 교수도 평가 대상 예외가 아님을 처음 확인시켰다. 세상이 달라졌다. 더 유효한 평가 지표가 수두룩하다. 이제 SCI에 이별을 고할 때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